1월, 2019의 게시물 표시

I must tell Jesus - Jamaica's Sanch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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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must tell Jesus all of my trials, I cannot bear these burdens alone; In my distress He promise to help me, He ever loves and cares for His own. Tempted and tried I need a great Savior, One who can help my burdens to bear; I must tell Jesus, I must tell Jesus: He all my cares and sorrows will share. I must tell Jesus! I must tell Jesus! I cannot bear my burdens alone; I must tell Jesus! I must tell Jesus! Jesus can help me, Jesus alone. I must tell Jesus all of my troubles, He is a kind, compassionate Friend; If I but ask Him He will deliver, Make of my troubles quickly an end. What must I do when worldliness calls me? What must I do when tempted to sin? I must tell Jesus, and He will help me Over the world the vict'ry to win. 작사: Kevin Anthony Jackson I Must Tell Jesus 가사 © Sony/ATV Cross Keys Publishing, COPYRIGHT CONTROL (NON-HFA), SUELION MUSIC OBO SANMONIK PROMOTIONS, SANMONIK PROMOTIONS INC

판단과 관련된 3대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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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판단을 극히 조심하라  예수님은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면 성도는 더욱 판단을 조심해야 한다. 왜 판단을 조심해야 하는가? 판단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을 침해하는 교만이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4장 11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율법은 남을 판단하고 비방하는 척도로 주신 것이 아니라 내게 거울로 준 것이고 남에게는 사랑의 표준으로 준 것이다.  율법은 내게 적용시키는 것이지 남의 얼굴에 거울을 들이대며 “네 허물을 보라.”고 윽박지르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남의 얼굴에 묻은 작은 얼룩을 침소봉대해 판단하면 율법 정신을 거스르는 것이고 “형제를 비방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라.”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주권 침해다. 부모가 “형제간에 화목하게 지내라!”고 했는데 계속 싸우면 그것은 형제간의 문제를 떠나 부모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다. 그처럼 남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기에 최대한 판단을 자제하라.  또한 판단은 인간관계의 질서를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판단은 판단하는 자를 재판자의 위치에 서게 하는 위험성이 있다. 형제관계는 차등관계가 아닌 대등관계로서 질서 측면에서는 차등이 있어도 권리나 인격 측면에서는 차등이 없다. 그러나 판단하는 자는 자기를 우등한 존재로 여기기에 형제간의 관계성을 파괴한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판단할 때도 주의해야 하지만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판단할 때는 더 주의해야 한다. 2. 증거를 통해 판단하라  살다 보면 최대한 판단하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판단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즉 ‘비방을 위한 판단’이 아닌 ‘분별을 위한 판단’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그때도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명백한 증언이나 증거에 의해 판단하라. 판단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증언은 말씀이다. 구약시대의 율법도 하나의 증언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신 예수님의 말씀이다.  구약시대의 율법은 “사람을 죽이지 말

I've got my mind made up Caribbean Med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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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e got my mind made up and I won't turn back  Because I want to see my Jesus someday  I've got my mind made up and I won't turn back  Because I want to see my Jesus someday I've got my mind made up and I won't turn back  Because I want to see my Jesus someday  I've got my mind made up and I won't turn back  Because I want to see my Jesus someday Goodbye world, I stay no longer with you  Goodbye pleasures of sin, I stay no longer with you  I've made up my mind to go God's way the rest of my life  I've made up my mind to go God's way the rest of my life Goodbye world, I stay no longer with you  Goodbye pleasures of sin, I stay no longer with you  I've made up my mind to go God's way the rest of my life  I've made up my mind to go God's way the rest of my life Born, born, born again Thank God, I'm born again  Born, born, born again Thank God, I'm born again  Born, born, born again Thank God,

God Works 주가 일하시네 - Brai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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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함께 하나님이 주신 은혜.. 흘러보내는 일에 동참해주세요... 더 궁굼한 것 있으신 분들은 제게 매시지 언제나 보내주시면 잘 나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역 초청 문의, 간증과 찬양, 공연, 강의 : 아래에 정보 있습니다.) 날이 저물어갈 때 빈 들에서 걸을 때 그 때가 하나님의 때 내 힘으로 안될 때 빈 손으로 걸을 때 내가 고백해 여호와 이레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주께 아끼지 않는 자에게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신뢰하며 걷는 자에게 우리 모인 이 곳에 주님 함께 계시네 누리네 아버지 은혜 적은 떡과 물고기 내 모든걸 드릴 때 모두 고백해 여호와 이레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주께 아끼지 않는 자에게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신뢰하며 걷는 자에게 'God Works' - Brian Kim When the day comes to an end, and we're walking in a remote place all alone. That is exactly God's perfect time (to work). When I have no strength. When I walk with empty hands. I confess that God is my Provider (Jehovah Jireh). God works. God works. He works for those who give their all to Him. God works. God works. He works for those who trust in Him and walk with Him. In this place where we have gathered. God is with us now. We experience the Father's grace. As I offer my small fish and bread, everyone confesses that God is Provider(Jehovah Ji

오직 주님만 바라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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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적을 좋아하지 말라 >  요새 어디에 가면 기적적인 치유가 있다고 사람들이 몰린다. 그러면 치유를 준다는 사람은 예수님의 동생쯤으로 여겨지고, ‘위대한 종’이 된다. 그렇게 사람이 높아지면 천국 상급은 없어지고 대개 그 높아진 사람은 예수님의 길과 반대로 간다. 더욱 큰 문제는 잘못된 길로 가면서도 잘못된 길로 가는 줄 모른다는 것이다.  기적 중에는 사탄이 주는 기적도 많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사탄의 기적에 대해 경고한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9-10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은 사탄의 최대 활동 무기다. 치유가 믿음의 징표는 아니다. 사탄의 역사로 나타나는 치유도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치유만 구하며 따라다니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아 결국 구원을 못 받는다고 말했다. 이방 종교에도 치유는 있지만 구원은 없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만 바라보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기적을 보고 사람들이 몰려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참된 목자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기적이 주님보다 앞서면 결코 안 됩니다. 기적을 바라보고 오지 마세요.” 그러면서 잘못된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오는 사람을 물리치고 바른 믿음을 권면해야 비로소 하나님이 주시는 진짜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고 동시에 그 영혼도 구원받는다.  바른 신앙을 도전하면 그때부터 문제 아닌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런 바른 메시지를 재미없게 생각하고 신기한 표적을 찾아 두리번거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리가 다 떠나고 겉으로는 시시하게 보여도 하나님이 원하는 참된 길을 따라야 천국에도 갈 수 있고 천국 상급도 클 것이다. 그런 인기 없는 길은 예수님이 원하는 길이면서 직접 가셨던 길이다. < 오직

Four Days L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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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s came that Jesus Please come fast Lazarus is sick And without your help he will not last Mary and Martha watched their brother die They waited for Jesus He did not come And they wondered why The dead watch was over Berried four days Somebody said "He'll soon be here, the Lord's on his way" Martha ran to him and then she cried "Lord if you had been here You could have healed him, He'd still been alive" But Lord, four days late And all help is gone Lord we don't understand Why you waited so long But his way is God's way Not yours or mine And isn't it great When he's four days late He's till on time Jesus said "Martha, show me the grave" But she said "Lord, you don't understand, He's been there four days" The grave stone was rolled back Then Jesus cried Lazarus come forward Then somebody said "He's alright, he's alive" You may be fighting a battle of fear You cry to th

주님과 깊이 만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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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과 깊이 만나라 >  본문의 간음한 여인은 주님과 단 둘이 만났을 때 변화될 수 있었다(9절). 당시 유대 랍비들은 여자를 보면 안 된다고 여자가 보일 때 눈을 감고 지나가다가 돌부리에 부딪쳐 넘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문화에서 예수님이 간음한 여성과 대화하는 장면은 무수한 오해와 비판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결국 주님과의 깊은 만남과 대화로 그 여인은 새로워질 수 있었다.  아무리 큰 죄인도 주님과 깊이 만나면 새롭게 된다. 예수님이 여자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보면 그녀의 간음죄는 상습적이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그런 죄인도 주님과 깊이 만나면 새로워질 수 있다.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가지라. 그때 사랑과 용서의 능력을 체험하고 더욱 새로워질 수 있다. 당시 율법주의자들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고 했지만 주님은 사랑을 던졌다. 그 사랑과 용서가 여인을 변화시켰다.  요새 사람들은 조금만 잘못해도 무섭게 비판하지만 비판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비판하면 어둠이 계속되지만 사랑하면 새로운 축복의 세계가 곧 펼쳐진다. 사랑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남과 나를 살리는 길이다.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치료약은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얻는 사랑과 용서의 약이다. 사랑은 자기를 극복하고 넘어서는 것이다. 사랑하면 내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고 남의 마음을 생각하며 행동한다.  사랑할 때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무엇인가? “괜찮다.”는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괜찮다는 말까지 해서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까지 편하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남도 변화시키지만 나도 변화시키고 남의 목마름도 채워주지만 나의 목마름도 채워준다. 사랑을 받는 삶의 목마름이 채워지지 않으면 사랑을 주는 삶의 메마름이 나타난다. 사랑하는 사람은 쉽게 비판하고 정죄하지 않는다. 남의 입장에 설 줄 알고 남의 자리에 앉을 줄 알고 남의 위치로 내려갈 줄 알기 때문이다.  사랑은 못난

주님 뜻대로 사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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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님의 뜻에 맡기라  어느 날 온 몸에 나병 들린 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려 구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12절).” 이 고백은 “흉측한 나 같은 사람도 깨끗하게 하길 원하십니까?”라는 의심의 고백보다는 주님의 뜻에 자신의 치유를 온전히 맡기는 믿음이 내포된 고백에 가깝다. 그처럼 기도 응답은 물론 모든 일에서 겸손하게 주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믿음을 가지라.  살다 보면 무엇인가를 잃기도 한다. 그때 너무 상실감에 젖지 말고 그 상황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라.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라. “하나님! 원하시면 제 것을 가져가세요.” 그 고백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많은 것이 없어져도 다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믿음과 함께 심력과 실력을 준비하라. 나를 계속 준비시키면 무엇인가를 잃고 누군가 떠나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더 나은 내일을 펼쳐갈 수 있다.  이별의 아픔이 있어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더 나를 준비시키라. 내가 떠나야 할 상황도 하나님이 있게 하셨다. 그때 새로운 차원과 환경에서 남은 생애를 멋지게 불태우면 역전 인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남이 나를 떠나면 잠시 상처가 되지만 그것도 나를 좋게 하려고 하나님이 있게 하신 상황이다. 그때도 사명의 길을 꾸준히 가고 새로운 만남을 통해 새로운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면 된다. 남이 나를 떠나면 그것은 그가 자기 복을 차는 것이라는 배포와 자신감을 가지고 그를 축복해주며 깨끗이 잊으라.  복의 근원이 되는 준비를 하면 길이 막힌 상황을 더 나은 진보 상황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남이 나를 버리고 떠날 때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큰 상처를 입지만 준비된 사람은 큰 상처를 입지 않는다. 심력과 실력을 준비하라. 그 중에서 가장 잘 준비해야 할 것은 “이 상황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뤄진 상황이다.”라는 믿음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뤄졌다고 믿고 과거를 잊고 새로운 내일을 향해 나아가면 내 미래는 과거보다 더욱 찬란할 것이다

진리를 막는 3대 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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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기  유대 교권주의자들이 왜 예수님을 잡으러 아랫사람들을 보냈는가? 무리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이분보다 많은 표적을 행하시겠는가?”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가장 큰 이유는 시기 때문이었다. 시기는 시비와 관련이 깊다. 사랑이 없이 공의만 따지고 옳은 편에 있는가보다 내 편에 있는가를 보며 편 가르기를 할 때 생기는 감정이 시기다.  나의 일과 남의 일의 경중을 따지며 비교하지 말라. 내가 못하는 일을 남이 하면 시기하지 말고 남이 대신 해주는 것으로 여기고 감사하라.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각자의 위치로 부름 받은 동역자다. 남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휘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실 때가 많다. 위치의 차이나 능력의 편차를 두신 것은 차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더욱 잘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다.  같은 쟁기를 지운 겨릿소로 땅을 갈 때 왼쪽의 안소는 크고 노련한 소다. 오른쪽의 마라소는 안소에 이끌리며 일을 익힌다. 안소도 마라소로 인해 밭갈이가 쉬워진다. 하나님은 나를 성장시키려고 나보다 일 잘하는 안소 성도를 예비하셨다. 안소 성도는 배움의 대상이지 시기 대상이 아니다. 위대한 모델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안소를 존중하고 마라소의 길을 묵묵히 가면 점차 하나님의 일을 멋지게 감당하는 안소의 위치에 서게 된다. 2. 무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시기심에 사로잡혀 정상적인 판단을 못하고 엉뚱한 저주까지 하자 보다 못해서 바리새인 중 하나인 니고데모가 말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51절).” 니고데모의 말은 정상적인 판단을 위해 2가지 자세가 필요함을 말해준다. 첫째, 듣는 귀를 가지고 사람의 말을 잘 듣는 자세다. 둘째, 마음을 열고 상황을 잘 알려는 자세다. 무지가 때로는 큰 죄다.  사람이 헛된 욕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분별력과 판단력을 잃는 이유는 대개 체험은 있지만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을 시원하게 만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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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의 역사할 때 생기는 일 >  예수님은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가서 명절 마지막 날 본문 말씀을 전하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본문 말씀과 쌍둥이 말씀이 요한복음 4장 14절 말씀이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본문에 나오는 ‘생수의 강’과 요한복음 4장 14절에 나오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은 성령의 역사를 뜻한다. 성령이 역사하면 어떤 역사가 생기는가? 첫째, 내 영혼이 시원해진다. 성령의 역사는 자기 내부에 있는 외부의 힘이다. 본문 38절의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말씀에서 ‘그 배에서’라는 표현과 요한복음 4장 14절의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는 말씀에서 ‘그 속에서’라는 표현은 성도의 내부에 강력한 힘이 존재하는 것을 말해준다.  왜 영혼이 곤고해지는가? 분명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면서도 하는 죄 때문이다. 또한 분명히 해야 할 것을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허물 때문이다. 죄와 허물로 얼룩진 삶을 새롭게 하려면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 성령이 역사하면 분명히 해야 되는 것을 알지만 하지 못하던 ‘선한 일’을 하게 해준다. 또한 분명히 하지 말아야 되는 것을 알지만 자기도 모르게 하던 ‘세상적인 일’을 끊게 해준다. 그때 영혼이 시원해진다.  둘째, 남의 영혼을 시원하게 만든다. 성령이 역사하면 흘러넘치는 특징이 나타난다. 성령의 역사를 표현하면서 요한복음 4장 14절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고 했지만 본문 38절은 그보다 더 나아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난다.”고 했다. 샘물은 물이 흘러들어가서 그 압력으로 솟아난 것이고 생수의 강은 솟아난 샘물이 강물이 되어 넘치게 흘러나가는 것이다.  강물이 되어 흘러나간다는 말씀은 사랑이 흘러넘쳐야 한다는 메시지가 있다. 가

복된 삶을 위한 3대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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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명의식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을 보냈다는 소명의식이 분명했다(28-29절). 그래서 어려움 속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이 이곳으로 나를 불렀다. 하나님이 이 일을 위해 나를 세웠다. 하나님은 나를 향한 찬란한 계획이 있다.” 복된 성도의 공통적인 특징은 분명한 소명의식이다. 소명의식은 확신, 열정, 목적을 뚜렷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뜻을 우선순위에 두게 한다.  소명의식이 분명하면 작은 일을 해도 속상해하지 않는다. 내게 주어진 몫이 부족하다고 부러워하거나 질투하거나 원망하거나 싸우지도 않는다. 자신을 역사의 핵으로 알고 살기 때문이다. 핵은 작지만 그 속에 폭발력이 생기면 핵폭탄이 된다. 현재 내 모습이 미약해도 내 안에 성령의 불이 들어가면 핵폭탄처럼 많은 사람의 가슴을 두드리는 놀라운 인물이 될 수 있다.  또한 소명의식이 분명하면 내면에 거룩한 삶의 목적으로 가득 차서 공허함이 사라지고 만족감과 충족감이 생기기에 마음도 너그러워진다. 소명의식과 이웃사랑은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소명의식이 커지면 용납하는 힘도 커진다. 소명의식은 행복의 요체다. 사나운 성질과 조급한 성격을 극복하는 해결책은 소명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큰 인물이란 소유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소명의식이 투철한 사람이다. 2. 섬김의식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오셨다(마 20:28). 친히 그렇게 말씀했고 실제로 그런 삶을 사셨다. 표적을 행한 것도 섬김을 발거나 인기 끌려고 행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섬김의 삶이 내게 나타나게 하라. 섬김은 너를 위해 내가 낮아지는 사랑이다. 낮아짐이 없다면 사랑을 배울 기회조차 잃는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약자를 섬기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도 이기적인 사람이나 불순한 사람으로만 보지 말라. 마음으로라도 그의 처지에 공감하는 것도 섬김이다. 사람을 섬길 줄 알아야 사람답게 된다. 섬김으로 창백한 세상에 거룩한 핏

인생에서 중요한 것 3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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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것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려 하다 보면 어떤 교훈이 하나님의 교훈인지 알 수 있다(17절). 참된 지식인이란 ‘머리로만 아는 사람’이 아니라 ‘아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잘 알고 잘 가르쳐도 실천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행동이 없는 지식인을 보면 거리의 이정표가 생각난다. “이쪽으로 가라! 저쪽으로 가라!”고 방향 표시를 해서 남은 다 그쪽으로 보내면서 자기는 그쪽으로 가지 않고 그대로 서 있는 이정표의 모습이 행동이 없는 지식인의 약점이다.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좋은 줄은 알지만 실제로 원수를 사랑해야 그 말씀을 온전히 아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작은 교회면 어때요? 작은 교회가 훨씬 보람이 있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몸은 큰 교회로 간다. 언행이 일치하지 않으면 참된 축복이 멀어진다. 반면에 행하려고 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축복이 반드시 있다. 진리라고 생각되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면 그대로 행할 때 참된 축복이 예비된다.  미국의 종업원이 주문받는 레스토랑에서 팁이 필수다. 그런데 주문받는 종업원에게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라고 하고 식사한 후 팁은 놓지 않고 동전 몇 개만 남겨두고 심지어는 팁 대신 전도지를 남겨둔다면 믿음에 먹칠을 하는 셈이 된다.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믿는 하나님을 누가 믿고 싶겠는가? 천국 성도는 늘 권리보다는 책임을 먼저 생각하고 부분보다 전체를 먼저 생각하고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2.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참된 사람과 불의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참된 사람이고 자기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불의한 사람이다(18절).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삶에 머물게 하고 싶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말라. 가끔 보면 위선자들도 영광을 거절할 때가 있지만 그들은 가식으로 겸손하게 행동해서 더 영광을 받으려고 한다. 하나님은 그 속마음을 다 아신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말라.

거룩함에 이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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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함을 오해하지 말라 >  유명한 김밥 프랜차이즈가 있다. 그곳이 이단 단체가 운영하는 곳이란 루머를 앞세워 예전에 일부 영성주의자들이 불매운동을 벌였다. 진위 여부를 떠나 거기서 식사하지 않는 것을 거룩함이라고 여기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극단화시킨다. 더 나아가 거기서 식사하는 남을 거룩하지 못하다고 정죄하면 더욱 극단적인 모습이 된다.  한 사람이 하는 일, 관련된 일, 언어, 성격, 취미 등을 조합하면 수만 개도 넘는 삶의 형태가 나온다. 지구의 인류가 수십 억 명이기에 전 지구인에게 나타날 수 있는 삶의 형태는 수십 조 개도 넘는다. 그 중에 몇 개의 삶의 형태를 거룩함의 기준으로 삼아 영적인 우월감을 가지면 안 된다. 믿음 안에 있는 삶의 전반적인 모습을 보고 거룩한 존재라고 인식하는 것이지 어떤 한두 가지 삶을 실천하기에 거룩한 존재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A 집사가 한 영화를 좋아했다. 어느 날 그는 그 영화 주인공이 이단 교회 신자란 말을 들었다. 그때부터 그 연예인이 나오는 영화는 안 보고 옛날에 봤던 영화의 좋은 기억도 다 지우려고 했다. 죄의 흔적을 벗겨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애쓰는 삶이 거룩한 삶인가? 하나님은 그런 모습을 보고 가상하게 여기기보다 안타깝게 여기면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아무개야! 네가 벗겨내야 할 죄의 흔적이 그것뿐이겠니?”  더 나아가 A 집사는 남들에게 그 연예인의 영화를 보지 말라고 했다. 사람들이 물었다. “그에게 원한이 있어요?” 그가 대답했다. “그는 이단 신자예요.” 그러면 분별력 있는 사람은 그를 거룩하게 보기보다 거룩하게 보이려고 애쓰는 사람으로 본다. 거룩함을 기준으로 3종류의 사람이 있다. 거룩한 사람, 거룩하지 않은 사람, 거룩하게 보이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둘째 사람과 셋째 사람 중 누가 더 정신이 병들기 쉬운가? 스스로 판단하라.  문제는 A 집사가 그 연예인의 영화는 보지 않아도 거의 매일 한 커피 가맹점에 들린다는 점이다. 그 커피 가맹점은 한국 사람이라면

십자가를 기쁘게 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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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기쁘게 지라 (요한복음 7장 1-6절) <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라 >  어떤 사람이 명성을 얻으면 괜히 질투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처럼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사건 등으로 대중들의 인기를 끌자 시기해서 어떻게 하면 죽일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잠시 갈릴리에 후퇴해 계셨다(1절). 인간적으로 보면 당시의 서울인 유대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는 것이 두만강 근처 청진쯤 되는 갈릴리 지역에서 활동하는 것보다 낫다. 그래도 예수님은 유대에서 잠시 물러나 갈릴리로 후퇴하셨다. 그때 예수님의 형제들조차 예수님을 초막절에 갈릴리를 떠나 유대로 가시라고 했다(2절).  초막절 때 전 세계에서 수십만 명의 유대인이 모이니까 예수님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언뜻 보면 예수님의 형제들도 예수님의 능력을 믿은 것이다. 그러나 본문 5절은 그들의 언행을 정반대로 해석하며 그들의 언행은 겉으로는 믿는 것 같지만 믿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왜 그런가? 첫째,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은 믿었지만 예수님의 뜻은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3절처럼 주님을 유대로 가라고 재촉했지만 주님이 갈릴리에 잠시 머물고 있는 이유를 생각할 줄 알아야 했다.  둘째,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 사람들의 인기를 끄는 데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본문 4절을 보면 그들에게는 깜짝 놀라는 능력으로 사람들을 끌려는 종교적 허영심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종교적 허영심이 담긴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적도 이끌어내지 못한다. 신앙생활 하면서 신기한 현상을 추구할 수도 있고 기존 교회에 무서운 비판을 가할 수도 있지만 그런 행동과 비판에 ‘자신의 종교적 허영심’이 개입된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자가진단을 해야 거짓된 믿음에 빠지지 않는다.  셋째,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 자기 유익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이 능력으로 왕이 되면 자신들에게도 한 자리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형제들뿐만 아니라

리더에게 필요한 4대 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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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명의식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냈듯이 하나님이 나를 이 시대에 이곳에 보냈다는 소명의식을 가지라. 사람이 언제 행복해지는가? 소명의식을 발견할 때다. 살다 보면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발견하면 이렇게 고백한다. “이 일을 위해 내개 태어났구나! 일생을 기꺼이 바치자.” 그때 행복해진다. ‘정신적인 병’과 가장 반대되는 개념은 ‘투철한 소명의식’이다. 인생의 거룩한 이정표가 분명하면 정신적인 혼돈이 사라진다.  소명의식을 가지라. “하나님이 나를 이 일로 부르셨다.”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지금의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삶은 행복해진다. 소명의식을 가지라는 말은 세상의 수많은 문제들을 잘 해결하는 능력 있는 해결사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에 가서 내 앞에 놓인 작은 일이라도 하라는 뜻이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살려면 선택의 순간에 3가지 기준을 바탕으로 선택하라. 첫째, 빵보다 말씀을 선택하고, 둘째, 인기보다 진리를 선택하고, 셋째, 다수보다 소수를 선택하라. 2. 넓은 수용성  예수님께 오는 자는 주님이 내어 쫓지 않듯이 진실한 마음으로 나를 찾아오는 자는 기쁘게 맞아주는 넉넉함과 수용성을 갖추라. 때로 못마땅하게 행동한 사람이 찾아올 때도 그가 진실한 마음으로 찾아오면 넉넉한 마음으로 수용하라. 내게 용서가 없으면 나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도 없고 내게 너그러움이 없으면 나에 대한 하나님의 너그러움도 없다. 뇌파 연구가들은 용서하는 마음이 넘칠 때 마음을 안정시키고 창조성을 증대시키는 뇌파가 나온다고 한다. 남을 살려주려고 하면 내가 살고 남을 받아주면 나도 많이 받게 된다.  살면서 말이 되는 얘기만 들을 수는 없다.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들을 때도 있다. 그래도 그 자리에서 변명하려고 하지 말라. 그 사람 나름대로 그렇게 생각할 수 있으니 그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라. 사실 부족한 허물이 그것뿐이겠는가? 누가 나의 허물을 비판할 때 다른 허물도 많은데 그 허물만 들추니까 넉넉한 마음으로 “허허

기적을 준비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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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사하는 삶  본문의 상황은 절망적이다. 예수님의 손에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었지만 먹일 사람은 오천 명쯤 되었다. 그런 안타깝고 처절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예수님은 떡을 가져 축사하셨다(11절). ‘축사했다’는 말은 ‘축복하고 감사했다’는 말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전혀 감사할 상황이 아니지만 그때 감사하면 엄청난 능력과 기적이 준비된다. 어려울수록 감사의 언어를 선물로 드리라.  어려울 때 나오는 ‘감사의 말’은 어떤 위대하다는 사람의 안수나 능력 있는 기도보다 더 능력 있는 것이다. 입술에 감사의 언어가 끊이지 않는 사람이 진짜 시인이고 최고 영성을 가진 사람이다. 감사는 최고의 덕이고 감사를 아는 자가 최고의 인격자다. 기적 전에는 대개 감사가 있다. 감사는 위대한 기적의 원천이다. 또한 은혜에 대한 깨달음의 징표이자 신앙성숙의 표시이고 육체와 정신과 영적생활에 가장 유익한 것이다.  감사는 최고의 선행이고 이전보다 더 축복 받게 만드는 최고 비결이다. 감사를 생활화하라. 감사는 내 삶과 주변을 훈훈하게 해주는 불씨다. 원망과 불평과 불만은 삶을 한대지방으로 차갑게 만들지만 “감사합니다. 수고합니다.”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는 삶을 꽃동산처럼 아름답게 만든다. 환경을 극적으로 변화시키고 문제를 극복하게 만드는 최고의 기적적인 도구가 감사다. 2. 절제하는 삶  그때 무리들이 앉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어디선지 음식이 하염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5천 명이 원대로 먹고 배불렀다. 그때 예수님은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하셨다(12절). 기적적으로 공짜로 먹을 것을 얻었다고 해서 그것을 낭비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응답 이후의 삶도 중요하다. 응답받았다고 기도를 그치거나 자기를 과시하지 말고 응답 후에 더 기도하면서 자신을 감추라.  자녀를 잘 키우고 싶으면 근검절약을 실천시키고 그 절약한 돈으로 어려운 이웃과 선교사를 돕게 하라. 그때 자녀들이 더 많이 배우고 더 축복받는다. 엄청난 부와 권세

떡 때문에 믿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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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떡 때문에 믿지 말라 >  오병이어의 기적 후 예수님이 말씀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떡 문제는 현실적인 문제지만 그것을 주된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고 기도하고 교회에 나오면 복된 믿음을 얻을 수 없고 자신의 가치도 낮아진다는 암시다. 성경을 보면 에서가 큰 잘못을 한 것 같지 않지만 팥죽 한 그릇 때문에 장자의 축복을 판 것 자체가 큰 잘못이다. 돈이 있어도 주님이 없으면 못산다고 고백하는 가난한 심령이 되고 세상의 떡 때문에 생명의 떡을 잃지 말라.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대결은 간단히 말하면 빵과 말씀의 대결이다. 공산주의의 창시자인 마르크스가 말했다. “먹는 문제만 해결하면 다른 문제는 다 해결된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먹는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했다. 먹는 문제에 집착하면 먹는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한다. 반면에 기독교는 사십일을 굶어도 빵보다 말씀을 앞세운다. 그래서 사탄이 떡으로 유혹할 때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말씀을 앞세우면 신비하게 먹는 문제도 해결된다.  나그네는 정처 없이 떠돌다가도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갈 존재다. 천국 나그네는 돌아갈 고향을 천국 생각으로 이 땅의 것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기에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고백은 “하나님! 제가 하나님 덕분에 성공했습니다.”라는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 제 소망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이다. 천국 나그네에게 세상은 다리와 같다. 천국 나그네는 다리를 건너가는 사람이지 다리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아니다.  많은 다툼은 다리 위에 화려한 집을 짓고 살려고 하면서 생긴다. 천국 나그네가 많아지면 세상 다툼은 줄어든다. 천국 나그네 의식을 가지면 미워하거나 시기할 사람도 없다. 다 같이 천국 고향으로 가는 나그네임을 알고 서로 도와주고 사랑하는 천국 나그네의 삶은

진리를 따라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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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리를 따라 살라 >  구원의 은혜는 공짜지만 축복의 은혜도 공짜는 아니다. 믿음을 공짜로 무엇을 얻게 하는 방편이나 도구로 여기지 말라. 구원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사람이 치를 수 없는 대가를 하나님이 대신 치른 셈이기에 엄밀하게 말하면 공짜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것은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낸 사건이다.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이해했다면 공짜의식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다. 죄인을 사랑해서 구원하고 싶어도 그냥 구원하면 공의가 무너지기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죄의 대가를 대신 치러 공의를 충족시킴으로 그 십자가의 대속을 믿는 죄인을 구원하셨다. 결국 ‘공의’와 ‘공짜’는 반대 개념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으려면 공짜의식을 버리고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거두는 것’보다 ‘심는 것’에 초점을 맞추라. 공짜의식을 버리고 열심히 심어야 거둘 것이 많아진다.  모든 삶의 기준인 성경 말씀 중 개인적인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대표적인 말씀 중의 하나가 갈라디아서 6장 7절 말씀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심지 않고 거두려는 공짜의식의 삶은 스스로 속이는 삶이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삶이다. 하나님은 ‘공짜의 하나님’이 아니고 ‘공의의 하나님’이다. 사랑과 친절과 땀을 내세워 심는 데 주력하라. 공짜로 무엇을 주고 속성으로 무엇을 해주겠다는 말에 너무 기대지 말라. 땀이 생략된 축복을 멀리해야 진리가 가까워진다.  요즘 사실인 팩트(fact)와 거짓인 페이크(fake)의 싸움이 치열하다. 많은 법정 다툼도 팩트와 페이크의 싸움이다. 잘 모르면서 페이크를 팩트로 알고 전하기도 하고 때로는 진실을 알면서도 어떤 이익을 얻으려고 팩트 대신 페이크를 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도는 손해가 예상되어도 최대한 진실해야 한다. 특히 영혼을 삼키려고 진리를 막고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