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022의 게시물 표시

당당한 눈물 Unapologetic T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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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누가복음 7:38] As she stood behind him at his feet weeping, she began to wet his feet with her tears. [ LUKE 7:38 ] ... 왜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릴 때 미안하다고 말할까요? 바리새파 사람 시몬이 예수님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여 예수님이 식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식사하실 때 죄를 지은 한 여인이 향유 옥합을 가져왔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누가복음 7:38). 여인은 당당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사랑을 표현했고, 자기 머리를 풀어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넘치는 감사와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그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향기로운 입맞춤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겉으로는 예의를 차렸지만 속은 냉담했던 주인과는 아주 대조되었던 행동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주님은 그 여인의 넘치는 사랑의 표현을 칭찬하셨고 여인의 “죄가 사하여졌다”고 선포하셨습니다(44-48절). 우리는 감사의 눈물이 북받칠 때 억누를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감정적인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에 그 감정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누가복음의 여인처럼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우리의 감사를 받으시는 좋으신 하나님께 사랑을 당당히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Loving God, thank You for Your grace in providing for my needs! I pour out my gratitude to You today.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로 제 필요를 채워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감사하는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습니다. [오늘의 양식  "당당한 눈물 Unapologetic Tears"  중]

세상에 유일한 내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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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출처 : iNDICA - 괴불나무 ] 세상에 유일한 내 편 사람들은 결혼하며, 상대를 최우선에 두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어느새 나를 최우선에 두고 나의 욕구만을 더 크게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그래서 때로는 그가 어디선가 받아온 상처에 무반응으로 대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이는 몰라도, 배우자에게 사랑과 격려를 거두는 것은 일종의 정서적 학대입니다. 내가 준 상처가 아니라도 침묵한다면, 그 자체가 상처가 됩니다. 세상에 유일한 내 편이어야하는 사람이니까요. [ CBS 1분 묵상 20220131 ]

응답 없는 기도 Unanswered Pray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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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시편 6:3] How long, Lord, how long? [ PSALM 6:3 ] ... ‘다 왔어요?’ ‘아직.’ ‘다 왔어요?’ ‘아직.’ 이것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 콜로라도 주에서 아칸소 주의 집까지 처음으로 (그리고 분명히 마지막도 아니었던) 16시간 동안 자동차로 가면서 함께 주고받았던 놀이였습니다. 큰 아이 둘이서 어찌나 끊임없이 이 말을 반복하던지, 만약 한 번 물어볼 때마다 1불씩 받았다면 꽤 많은 돈이 쌓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만 “다 왔어요?” 라는 그 질문에 집착했던 것이 아니라 운전을 하던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아직, 하지만 곧 도착하겠지.” 였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어른들도 말로 내뱉지 않을 뿐 이와 유사한 질문을 합니다. 그 이유는 다 같습니다. 우리는 지쳤고,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했기”(시편 6:7) 때문입니다. 저녁 뉴스에서부터 직장에서의 반복되는 좌절, 끊임없는 건강 문제, 사람과의 관계의 어려움 등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이 우리를 “탄식함으로 피곤하게”(6절)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울부짖습니다. “주님, 이제 다 왔나요?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시편 기자는 그런 피곤함을 잘 알았기 때문에 정직하게 하나님께 그 질문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자상한 부모처럼 다윗의 간구를 들으시고 자비롭게 받아 주셨습니다(9절). 질문할 때 그 어떤 부끄러움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담대하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나아가 “얼마나 더요?” 라고 솔직하게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은 이렇게 대답하실 지도 모릅니다. “아직은 아니란다. 하지만 거의 다 왔어. 나는 선하니 나를 믿으렴.” ... Father in heaven, the burdens of this world have me asking, “How long?” Thank You for welcoming such prayers, and please give me the strength to trust

거룩함의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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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출처 : iNDICA - 변산바람꽃 ] 거룩함의 기준 어떤 이가 진정으로 거룩하고 영적인 사람인지 알려면, 상대가 어떤 선행을 하는지, 혹은 악행을 하지 않는지, 혹은 신앙적 모임에 자주 참석하는지를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앞서는 기준은, 결국 세상에 즐비한 또 다른 죄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의 기준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즉 나보다 덜 거룩해보이는 사람이라도, 그것을 너그러이 참아주고 받아주며, 심지어 그 가운데서 건강하게 사는 것입니다. [ CBS 1분 묵상 20220130 ]

그리스도처럼 온전하게 Perfect Like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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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48] Be perfect . . .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 MATTHEW 5:48 ] ... 캐슬린 노리스는 현대사회의 완벽주의를 마태복음에서 묘사된 “온전함” 과 자세히 대조하면서 “완벽주의는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무서운 말 중의 하나”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현대사회의 완벽주의를 “사람들을 너무 소심하게 만들어서 필요한 위험조차 감수하지 못하게 만드는 심각한 정신적인 불행”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에서 “온전하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실제로 성숙하다, 혹은 완전하다, 혹은 다 갖추었다는 뜻을 의미합니다. 노리스는 “온전해지려면 성장을 위한 여지를 두어야 하고,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온전함의 의미를 이렇게 이해하면, 한 남자가 무슨 좋은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예수님께 질문한(16절), 마태복음 19장의 심오한 이야기를 깨닫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 질문에 “계명들을 지키라”(17 절)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남자는 계명을 다 지켰다고 생각했지만 무언가 놓친 것이 있음을 알고,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20절)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남자의 마음을 아주 강하게 붙잡고 있는 것이 바로 재물이라는 것을 아시고, 그가 만약 하나님 나라에 속한 다른 이들과 기꺼이 주고받음으로 “온전하게” 되고자 한다면, 다른 이들에게 굳게 닫혀 있는 마음을 기꺼이 떨쳐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21절). 우리는 모두 자기 방식대로의 완벽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이 소유이든 습관이든 우리는 그것을 지키려고 있는 힘을 다합니다. 하지만 오늘 이 시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만 가능한 온전함으로 자유를 얻으라는 예수님의 부드러운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26절). ... Loving God, forgive me for so of

포기하지 않는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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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출처 : iNDICA - 흰앵초 ] 포기하지 않는 희망 '목표는 최고를 지향하되 계획은 최악을 가정하라' 이것은 베트남 전쟁 당시 하노이 포로수용소에 갇혀서 8년이라는 긴 세월 후에 마침내 살아 돌아온 제임스 스톡데일 장군의 말입니다. 그는 8년간의 감옥 생활에서 4년간은 참혹한 독방신세를 졌고 20여 차례의 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고된 감옥 속에서도 결코 석방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으며 가까운 미래에 곧 풀려날 것이란 근거 없는 낙관도 하지 않았기에 석방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포기하지 않은 희망' 그것이 그에게는 구원의 등불이었습니다. [ CBS 1분 묵상 20220129 ]

힘써 일하고 힘써 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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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샤갈 - 출애굽 ] 본문말씀 : 출애굽기 20장 8-10절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  안식일을 기억하라는 말은 안식일을 깊이 주의해서 생각하라는 말이다. 요새 일부 단체에서는 안식일은 토요일이니까 토요일에 지켜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안식 후 첫날인 주일을 안식일로 지킨다. 안식일 개념은 유대교에서 정한 토요일을 꼭 지키라는 개념이 아니라 “6일을 일하고 하루를 예배일로 삼으라.”는 정신이 기본 바탕이다. 그래서 일주일의 하루를 예배일로 지킬 때 기독교에서는 유대교의 토요일 대신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을 예배일로 삼은 것이다.  주일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완성을 내포하는 날이기에 기독교에서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것은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그처럼 일주일의 하루인 주일을 예배하는 날로 지킴으로 모든 7일이 하나님께 속한 날임을 고백하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삶의 기본 정신이다. 또한 안식일을 지키는 삶은 주일을 예배하는 날로 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즉 ‘주일 외에 나머지 엿새 동안은 힘써 일하는 것(9절)’을 포함해야 안식일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이다.  6일 동안 열심히 일한 후 7일째 되는 날에는 아들, 딸, 종, 육축, 그리고 심지어는 문 안에 머무는 객도 모든 일을 쉬어야 한다(10절). 문 안에 머무는 객은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뜻한다. 그들은 일시적인 나그네가 아닌 영주권자들로서 이스라엘 사람과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졌다(신 29:11-13). 따라서 그들도 안식일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또한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거나(마 12:9-15) 밀 이삭을 잘라 먹는 일을 했다(

하나님 안에서 서로 신뢰함 In God We Put Our Tr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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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예레미야 17:7] Blessed is the one who trusts in the Lord, whose confidence is in him. [ JEREMIAH 17:7 ] ... 성경말씀이 우리 안에 뿌리를 내리면 힘든 상황을 대처하는 방법이 달라집니다. 예레미야는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사람들의 동맹을 중시하고 우상 숭배가 만연했던 시대에 살았습니다. 선지자는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예레미야 17:5)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함 같으리라”(7-8절).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삶의 해결책을 하나님에게서 찾으며 믿음으로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힘을 주실 때 우리는 두려워할지, 아니면 그분을 신뢰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기로 선택하면 복을 받고 ‘완전한 만족을 누릴’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 Dear God, thank You that I can trust You in all situations and come to You in prayer. You’re right there in the midst of my struggles, and You give me strength. 사랑하는 하나님,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저의 고난 가운데 함께 계시고 힘을 주십니다. [오늘의 양식  "하나님 안에서 서로 신뢰함 In God We Put Our Trust"  중]

산악인 고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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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출처 : iNDICA - 홀아비바람꽃 ] 산악인 고상돈 1977년 9월, 에베레스트의 빙벽을 한 사내가 기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이제 더는 더 나아갈 힘이 없었습니다. ‘그만 돌아가도 돼’ 그 때 벼락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포기하지 마라 바로 저 앞이 정상이다.’ 작고하신 그의 아버지의 목소리였습니다. 피켈을 움켜쥔 채 더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거의 탈진이 되었을 때 그가 본 것은 바로 히말라야 거봉들의 파노라마였습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태극기를 꽂은 이 사람, 바로 고상돈 대장이었습니다. 당신의 목표는 어디입니까. 정상을 눈앞에 두고 포기하지는 않았는지 한번 생각해봅시다. [ CBS 1분 묵상 20220129 ]

천 대까지 은혜 받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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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샤갈 : 금송아지를 경배함 ] 본문말씀 : 출애굽기 20장 4-6절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 우상을 만들지 말라 >  십계명의 둘째 계명은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이다(4절). 이 계명은 예술이나 실용적인 목적으로 어떤 형상을 조각하고 인형을 만드는 것까지 금지시킨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경배나 기복적인 목적으로 우상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우상숭배는 우상을 위해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숭배하는 것으로서 최대의 이기심의 산물이다. 에베소서 5장 5절은 탐하는 자와 우상숭배자를 동일시한다.  왜 우상숭배에 빠지는가? 탐욕을 가지고 헛된 말에 속기 때문이다. 우상숭배에 빠지면 이기주의자가 되면서 하나님 및 하나님의 뜻과 멀어진다. 그것이 우상숭배와 기복주의를 멀리해야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하나님의 뜻에 가장 불순종하는 것으로 여기시고 진노를 내리기에 우상숭배에 빠지지도 말고 우상숭배자와 어울리지도 말라.  사람을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우상숭배다. 우상숭배자들은 나무나 돌멩이나 부적 및 그 외에 수많은 대상에게 절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걸작으로 창조된 자신의 고귀한 가치를 모르고 자기보다 못한 것을 경배하니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철저히 배반하는 것이기에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부른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하셨다(5절). 질투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란 뜻이다. 바른 모습 안에 있는 건강한 질투는 꼭 필요한 건강한 감정이다. 하나님이 그런 질투하는 사랑을 가지시기에 성도의

원한을 품지 않기 Not Holding Grud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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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19:18] Do not seek revenge or bear a grudge against anyone among your people, but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I am the Lord. [LEVITICUS 19:18 ] ... 성경에도 “원한을 품었던” 이들에 대한 여러 사례가 나옵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고 자신의 것은 받지 않으신 것 때문에 동생 아벨에게 원한을 품었습니다(창세기 4:4-5). 이 원한이 너무 심해 “가인이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8절)라고 기록된 것처럼 결국 살인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야곱은 장자 에서가 받아야 할 축복을 훔쳤기 때문에 “ 에서는 야곱을 미워했습니다”(27:41). 에서가 품었던 엄청난 원한 때문에 야곱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도망쳤습니다. 성경은 원한을 품었던 이들의 사례를 보여줄 뿐 아니라 용서와 화해를 통해 어떻게 “원한을 풀”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레위기 19:18), 우리를 박해하며 해를 입히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용서하며(마태복음 5:43-47),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고, 원수 갚음을 하나님께 맡기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로마서 12:18-21)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도 지금 “원한을 풀”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Jesus, thank You that I can forgive others because You’ve forgiven me. 예수님, 주님께서 저를 용서해 주셨기에 저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오늘의 양식  "원한을 품지 않기 Not Holding Grudges"  중]

침묵으로 채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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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출처 : iNDICA - 호자덩굴 ] 침묵으로 채우라 사람들은 자기 고민과 문제를 남들에게 자주 묻곤 합니다. 어느정도 들을 수 있는 조언들이 있지만, 결국 그것은 그들의 답일 뿐, 사실 인생에 대한 답은 자기 안에 이미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항상 밖으로만 대답을 구하러 다니고, 세상이 말하는 것에만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정작 내 안에서 소리치는 지혜와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밖에서 안으로 귀를 돌릴 무언가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고요해져야 합니다. 오히려 침묵이 자신을 채우게 해보십시요. [ CBS 1분 묵상 20220127 ]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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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갈 : 십계명을 받다 ] 본문말씀 : 출애굽기 19장 23-25절 23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산 주위에 경계를 세워 산을 거룩하게 하라 하셨사온즉 백성이 시내 산에 오르지 못하리이다 2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라 너는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오고 제사장들과 백성에게는 경계를 넘어 나 여호와에게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 25 모세가 백성에게 내려가서 그들에게 알리니라 < 하나님의 거룩성을 지키라 >  이스라엘이 시내산 앞에 도착해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계명을 받을 준비를 다 마쳤다. 그리고 삼일 째 되는 날 아침에 하나님이 시내산 꼭대기에 강림해 거기로 모세를 불러 “내려가서 백성들을 경고하고 백성이 밀고 들어와 하나님을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 수도 있다.”라는 말씀을 전하게 했다. 또한 여호와께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에게 그 몸을 성결하게 하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을 칠 수도 있다고 말씀했다.  경계를 범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모세가 말했다. “하나님! 하나님의 명대로 산 주위에 경계를 세워 산을 거룩하게 하라고 해서 백성들이 시내산에 오르지 못합니다(23절).” 하나님이 그 사실을 아셨을 텐데 왜 또 같은 말씀을 했는가? 백성들이 한번 경고했다고 그대로 순종하면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대개 그렇게 하지 않기에 하나님이 또 경고의 말씀을 반복하신 것이다.  그 모세의 말을 듣고 하나님이 또 경계를 지키라고 하셨다(24절). 그렇게 반복해서 강조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지키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어떻게 연약한 사람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거룩성을 지키는가? 말도 안 되는 얘기 같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의 거룩성을 지키는 삶인가?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성을 지켜드리는 최고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모든 일에 합력해 선을 이루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전 존재를 절대 신뢰하는 일이다.  욥은 극심한 고난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고 고백하며

진정한 행복 True Happ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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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전도서 3:12] I know that there is nothing better for people than to be happy and to do good while they live. [ECCLESIASTES 3:12 ] ... 10세기 때 스페인 코르도바의 통치자는 압드 알라흐만 3세였습니다. 50년간의 성공적인 (“부하에게 사랑받고, 적군에게 위협적이며, 동맹군에게 존경받는”) 통치 이후 알라흐만은 자신의 삶을 깊이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린 특권에 대해 “모든 부와 명예, 권력과 쾌락이 내 통치 아래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진정 행복을 느낀 날을 세어보니 고작 14일 뿐이었습니다. 얼마나 냉정한 평가인지요. 전도서의 저자 또한 부와 명예(전도서 2:7-9), 권력과 쾌락(1:12; 2:1-3) 을 소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인생에 대한 평가도 똑같이 냉정했습니다. 그는 부는 더 많이 갖고 싶은 욕망으로 이끌 뿐이고(5:10- 11), 쾌락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2:1-2), 성공은 능력만큼 우연에 기인할 수도 있다(9:11)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평가는 알라흐만처럼 암울하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의 궁극적인 행복의 원천이었고, 하나님과 함께 먹고 일하고 선을 행할 때 그 모두가 즐거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2:25; 3:12-13). 알라흐만은 그의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결론 내렸습니다. “사람들아! 이 현실 세상에다 당신의 신뢰를 두지 마라!” 전도서의 저자 또한 이에 동의할 것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위해 창조되었으므로(3:11) 이 땅의 쾌락과 성취만으로는 만족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삶에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먹고 일하고 살아가는 일에서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 Heavenly Father, today I will do all things

나무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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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출처 : iNDICA - 애기실부추 ] 나무의 가르침 나무를 보고 있으면 나무는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특히 요즘 같은 겨울나무가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한 그루의 나무 안에 무수한 지혜와 많은 열매가 있습니다. 잎이 피는 봄 나무에서는 희망과 꿈 이야기가 있고 겨울나무에는 인내와 고통과 성숙의 이야기가 있으며 여름나무에는 아름다움과 풍성함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잎을 떨어뜨리는 겨울나무에는 비움과 버림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무야말로 진리를 말하는 가장 훌륭한 설교자이다' 헤르만 헤세의 말입니다. [ CBS 1분 묵상 20220126 ]

거룩함을 나타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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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거 쾨더 : 춤추는 미리암 ] 본문말씀 : 출애굽기 19장 14-15절 14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백성에게 이르러 백성을 성결하게 하니 그들이 자기 옷을 빨더라 15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준비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고 여인을 가까이 하지 말라 하니라 < 옷을 빨게 하라 >  이스라엘은 출애굽 한 후 시내 광야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백성들에게 옷을 빨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옷을 빨라는 말은 자신을 깨끗하게 단장하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라는 명령이다. 신앙이란 버릴 것을 버리는 결단이다. 삶이 초라해지는 이유는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음식이 끊어질 때 비로소 하늘의 만나가 내렸듯이 버릴 것을 버려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다.  손에 있는 것을 버리지 못하면 더 좋은 것을 얻지 못한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좇는다면서 여전히 양손에 너무 많은 것들을 들고 있기에 교회를 오래 다녀도 삶과 가정에 변화가 없고 위기의 사회를 구원할 능력도 없는 것이다. 손에 너무 많은 것을 잡으면 하나님을 잡지 못한다. 양손이 잡을 것은 다 잡고 하나님도 보너스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손에 있는 것을 버려야 비로소 하나님을 잡을 수 있다.  예수님은 제자가 되려면 가족과 친척까지 버리라고 했다. 이 말은 불효하고 자녀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놓으라는 뜻이다. 하나님과 가까워질 때 부모에게 진짜 효도하게 되고 자녀도 진짜 사명적인 자녀가 된다. 부부관계도 두 부부가 하나님과 가까워질 때 둘 사이가 더 가까워진다. 신기한 일은 내가 경건하게 살면 내 배우자도 달라지고 자녀도 달라진다.  가끔 이런 고민이 생긴다. “왜 나는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고 변화가 없는가? 왜 내 삶은 이렇게 영향력이 없는가?” 그런 고민이 들 때마다 자신의 손을 살펴보라. 손에 무언가를 가득 든 채로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아닌지 살피며 버릴 것은 버리라. 특별히 사람을 망령되고 허무하게

사랑의 하나님 Loving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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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요한1서 4:16] We know and rely on the love God has for us. [ 1 JOHN 4:16 ] ... 요한1서 4:10-21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하나님께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몇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우리 죄의 희생 제물로 보내시고(10절), 성령님을 주셔서 우리 안에 거하게 하셨습니다(13, 15절).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신뢰할 수 있으며(16 절), 더 이상 심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17절).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19절, 새번역) 우리가 그분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다음에 하나님의 백성들과 모임을 할 때 하나님을 왜 사랑하는지 함께 나누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연이어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우리는 더 가까워지게 될 것입니다. ... I’m grateful to know Your love and to be a part of Your family, Father. Show me ways to creatively express that love.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가족으로 삼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사랑을 여러 가지 창조적인 방법으로 보여줄 수 있게 해주소서. [오늘의 양식  "사랑의 하나님 Loving God"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