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020의 게시물 표시

성령님 묵상 13-1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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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슬라프 자보르스키] 본문말씀 : 고린도전서 6장 9-11절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님묵상(13) 권능을 주시는 성령님(행 1:8)  본문은 성령이 임해야 권능이 생긴다고 말씀한다. 왜 권능이 필요한가? 사람은 무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본능과 본성을 잘 통제하는가? 외적인 습성인 술이나 담배를 끊는 것도 그토록 힘든데 내적인 성격을 바꾸는 것은 지극히 힘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의 성격을 간단한 말로 변화시키려는 것처럼 겸손하지 못하고 무지한 일도 없다.  남을 변화시킬 목적으로 선생님처럼 설교조로 말하는 사람은 가장 무지한 사람이든지 가장 어수룩한 사람이다. 내가 할 일은 그를 성원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일 뿐이다. 사람은 사람의 성격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격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오직 하나님만 하나님이 주신 성격을 더 나은 차원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 변화의 기초가 바로 성령의 권능이다. 성령님묵상(14) 보증인이신 성령님(엡 1:13-14)  성령님은 불멸성과 영광의 보증인이시다. 그러나 그 보증하신 기업의 일부분이 현재 내게도 주어질 수 있음을 믿으라. 나의 구원은 죽어서 천국 가는 삶뿐만 아니라 현재의 차원 높고 건강한 삶도 포함하는 것이다.  왜 신유가 가능한가? 첫째,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으로 내게 그 생명을 나눠 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나의 영혼에서 육체까지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을 때 나의 육체는 하나님의

성령님 묵상 9-1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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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옥순 수녀님 성화 "예수의 세례, 우리의 세례 ] 본문말씀 : 에베소서 1장 13-14절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님묵상(9) 성령의 기름부으심(고후 1:20-22)  ‘성령의 기름부으심’에는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가? 기름은 제단과 깊은 관련이 있고 제단은 피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즉 성령님과 십자가는 1%의 오차도 없이 깊은 관련이 있다. 피가 없는 성령의 역사는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지만 그것은 1%도 기대하지 말라. 아무리 누가 대단한 말로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다고 꾀어도 ‘희생과 헌신을 모르는 성령충만’은 절대로 믿지 말라.  기름은 거룩한 사역을 위해 구별했다는 의미로 선지자, 제사장, 왕에게 부어졌다. 그러므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능력’보다는 ‘구별’을 연상하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능력보다 더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나는 하나님 앞에 구별된 자다.”라는 의식이다. 그 의식을 가지고 살면 하나님이 자연스럽게 힘, 능력, 거룩함, 지혜를 공급해 주신다. 성령님묵상(10) 불세례와 성령세례(마 3:11-12)  ‘불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은 어떤 메시지를 주는가? 성령님의 정화하시는 사역을 깨닫게 한다. 그와 관련해 말라기 선지자는 은을 만드는 대장장이에 관해 언급한다(말 3:2-3). 대장장이는 도가니 앞에 앉아서 찌꺼기가 사라지고 은만 남을 때까지 지켜보다가 도가니 속의 은에 자기 얼굴이 비치기 시작하면 연단을 멈춘다. 은을 연단하는 자는 성령님을 상징한다. 성령님은 나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연단하시다가 나의 모습에서 그분의 모습이 드러날 때 연단을 멈추신다.  연단이 있다고만 하소연하지 말고 내 안에

성령님 묵상 5-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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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순 수녀님 성화 "야곱의 우물가"] 본문말씀 : 요한복음 4장 14절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성령님묵상(5) 성령님의 사랑(롬 15:30-33)  은혜를 알면 은혜가 더 내린다. 감사를 알면 감사거리가 더 주어진다. ‘아는 것’이 복이다. ‘깨닫는 것’은 복중의 복이다. 성령님의 사랑을 깊이 인식하는 것은 성령님의 사랑을 깊이 받는 최선의 길이다.  성령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이제까지 나와 함께 하신 모습, 죄인을 찾아 구원하시는 모습, 내게 지칠 줄 모르는 관심을 표하는 모습, 나의 잘못된 태도를 보고 근심하시는 모습 등을 통해 성령님을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 성령님의 사랑은 무가치한 대상을 향한 ‘자발적 사랑’이었고 받을 내용보다는 줄 내용을 더 따지신 ‘헌신적 사랑’이었고 행동으로 직접 실천한 ‘의지적 사랑’이었다. 성령님묵상(6) 반석에게 말하라(고전 10:1-4)  출애굽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목말랐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쳐 물을 내게 하셨다(출 17:2-7). 39년 후 똑같은 상황에서는 모세에게 반석을 치지 말고 다만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다. 그때 모세는 자기감정대로 반석을 두 번 쳤다. 물이 넘치게 흘렀나왔다. 놀라운 능력으로 인해 모세도 흡족했고 백성들도 “모세는 역시 달라.” 하며 신나게 여겼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믿음 없는 행위’이고 ‘신성모독적 행위’라고 보셨다(민 20:8-12). 결국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흥분하지 말라. 소란스럽게 표시하지 말라. 반석이 갈라진 사건(십자가 사건,고전 10:4)이 이미 있었기에 이제는 믿음을 가지고 반석에게 인격적으로 말하라. 그러면 언제든지 성령의 생수를 경험할 것이다. 성령님묵상(7)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요 4:14; 7:38)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로 인한

Grace Outside The Box 생각의 틀을 벗어난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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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왕의 손자 므비보셋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왕들은 이전 왕실의 혈통을 다 죽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을 사랑했기에 살아남은 그의 아들을 자기 아들처럼 대했습니다(사무엘하 9:1-13 참조). 그가 은혜를 베풂으로 다윗은 평생의 친구를 얻게 되었습니다. 므비보셋은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에 두셨사오니”(19:28) 하며 경탄했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예루살렘에서 다윗을 뒤쫓을 때조차도 그는 다윗에게 충성을 다했습니다(사무엘하 16:1-4; 19:24-30). 충실한 평생의 친구를 원하십니까? 매우 특별한 누군가를 친구로 하려면 어떤 특별한 일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상식적으로 보아 처벌해야 할 때 은혜를 선택하십시오. 책임을 지게 하되 다시 바로잡을 수 있도록, 받을 자격은 없더라도 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그러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마워하고 헌신적인 친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 은혜로 대하십시오. Mephibosheth, grandson of King Saul, hadn’t done anything wrong, but he was in a tough spot when David became king. Most kings killed the royal bloodline. But David loved King Saul’s son Jonathan, and treated his surviving son as his own (See 2 Samuel 9:1–13). His grace won a friend for life. Mephibosheth marveled that he “deserved nothing but death from my lord the king, but you gave your servant a place” (19:28). H

하나님을 앞세워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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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순 수녀님 성화 "베드로와 예수] 본문말씀 : 나훔 2장 11-13절 11 이제 사자의 굴이 어디냐 젊은 사자가 먹을 곳이 어디냐 전에는 수사자 암사자가 그 새끼 사자와 함께 거기서 다니되 그것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었으며 12 수사자가 그 새끼를 위하여 먹이를 충분히 찢고 그의 암사자들을 위하여 움켜 사냥한 것으로 그 굴을 채웠고 찢은 것으로 그 구멍을 채웠었도다 13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네 병거들을 불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네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네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네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 힘을 악용하지 말라 >  <나훔> 2장에는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가 바벨론 연합군에게 패배하는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왜 니느웨가 비참하게 패망했는가? 사자처럼 힘이 있었지만 그 힘으로 남들을 잔인하게 대하고 더 많이 취하려고 욕심을 부렸기 때문이다(11-12절). 힘을 악용하면 자신도 상당한 대가를 치른다는 암시다. 힘을 추구하되 힘이 생기면 필요한 곳에 힘을 보태려고 하라. 힘은 행사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선용하라고 주어진 것이다. 힘이 있다면 힘이 없는 사람을 늘 살펴서 아래로 미끄러지는 사람의 손을 잡아끌어 올려주라.  많은 사람이 힘을 악용하는 사람 때문에 상처를 입고 불안에 떤다. 평화롭게 살고 싶어도 힘을 악용하는 사람 때문에 평화가 깨진다. 찬란한 비전도 힘 앞에서 맥을 못 출 때가 많다. 그때 사람들은 힘이 없음을 원망하다가 때로는 하나님까지 원망한다. 힘에 의해 압도당하면 비전이 퇴색되고 그저 살아남기만 해도 좋겠다는 굴종적인 태도가 생긴다. 인간의 역사는 그런 역사의 반복이다.  담대한 사람도 내면에는 두려움이 있다. 그 두려움은 때로 나를 잘못된 곳으로 이끌고 좋은 일을 시도하지 못하게 하며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마음으로 살기보다 간신히 연명하게 만든다. 힘 있는 사람에게서 불의한 일을 계

Trusting God In Times Of Sor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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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디모데후서 1:12).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은혜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강하게 하기 위해 사랑하는 이의 죽음까지도 사용하십니다(9절). 만약 당신이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주님이 위로와 평안을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I know whom I have believed, and am convinced that he is able to guard what I have entrusted to him until that day” (2 Timothy 1:12). God can use even the death of a loved one to strengthen our faith in Him (and the faith of others) through the grace we receive in Christ Jesus ( v. 9). If you’re experiencing anguish and difficulty, know that He can bring comfort and peace.- AMY BOUCHER PYE ... Heavenly Father, fan into flame the gift of faith in me, that I might share with love and power my testimony of how You work in my life. 하나님 아버지, 제 속의 믿음의 선물이 더욱 불타오르게 하셔서, 하나님이 제 삶에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사랑과 능력으로 제 간증을 나눌 수 있게 해주소서. [오늘의 양식  "슬플 때 하나님을 신뢰하기 Trusting God In Times Of Sorrow"  중]

내 앞으로 계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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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순 수녀님 성화 "우리가 살아가는 기쁨"] 본문말씀 : 빌레몬서 1장 18-19절 18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19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 좋은 후원자를 가진 복 >  미국에서 신대원을 다닐 때 미국인 학생들을 보면 가끔 연민이 생겼다. 미국에서는 만 18세가 넘으면 부모로부터 독립하니까 대학에 진학하면 대부분 집을 떠나 기숙사에 들어간다. 그리고 의식주와 학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허드렛일도 한다. 그런 자립적인 태도가 좋은 것이지만 한국 문화에 젖은 저에게는 안쓰럽게 보였다. 고학으로 자기 길을 개척하는 것도 좋지만 부모의 든든한 후원이 있는 것도 좋다.  미국 신대원 시절에 비교적 가까이 지낸 5명의 친구가 있었다. 그 중에 짐 턴불(Jim Turnbull)은 바로 옆방 친구로서 필자가 어려울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90년에 600불을 주고 하드디스크가 없는 랩탑 컴퓨터를 샀는데 원했던 한글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없었다. 컴퓨터 플라피 디스크 용량이 한글 프로그램의 용량보다 작았기 때문이다. 어려운 유학시절에 거금 600불을 주고 산 제품을 쓰지 못하게 되자 마음이 크게 상했다.  그때 짐이 다가와 컴퓨터를 산 날 밤부터 자신의 고성능 컴퓨터로 한글 프로그램의 용량을 압축시켰다. 그 일은 컴퓨터 도사였던 그에게도 쉽지 않았다. 그가 전혀 한글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 필자와 함께 한글 구조를 익히면서 며칠간 고생한 끝에 한글 프로그램 용량을 플라피 디스크 하나로 압축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디스크를 넣고 필자의 컴퓨터에 한글 프로그램이 뜨는 것을 본 순간 너무 고마워서 목이 메일 정도였다.  당시에 그를 통해 부모의 넉넉한 후원을 받고 자란 자녀에 대한 인식이 크게 변했다. 그는 아버지가 코카콜라 회사의 부회장이어서 잘 살았지만 교만하지 않고 다

Cultivating God's World 하나님의 세상을 경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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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일을 하도록 맡기셨을까요? 창세기 1장에 그 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잘 관리하도록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26절). 믿지 않는 사람들은 태초에 “신들이” 인간을 그들의 노예로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창세기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그분의 뜻에 따라 창조하신 이 세상을 관리하도록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인간을 만드셨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지혜롭고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 세상에 잘 수행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세계를 경작하라는 소명입니다. Why did God put us in a particular place with a particular assignment? Genesis 1 gives us the answer. We’re made in God’s image to carefully steward the world He made ( v. 26). Pagan stories of the way the world began reveal “gods” making humans to be their slaves. Genesis declares that the one true God made humans to be His representatives—to steward what He’d made on His behalf. May we reflect His wise and loving order into the world. Work is a call to cultivate God’s world for His glory.-GLENN PACKIAM ... Dear God, thank You for the honor of joining You in Your work in the world. Help me to reflect Your love, wisdom, and order in my life and in the place where I

Betrayed 배반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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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당했습니다.’ 유다의 배반으로 인한 고통은 “내 빵을 먹는 자가 나를 배반하였다”(18절, 새번역)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 분명히 드러납니다. 음식을 같이 먹을 정도로 가까운 친구가 예수님을 해치기 위해 그 관계를 이용한 것입니다. 우리도 친구의 배반을 경험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고통에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자기를 배반할 자가 식탁에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요한복음 13:18) 인용한 시편 41편 9절 말씀은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다윗은 두 마음을 품은 가까운 친구를 보고 번민을 토로한 후, 그를 붙드시고 영원히 하나님 앞에 세우실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하심에 위로를 받습니다(시편 41:11-12). Betrayed. The pain of Judas’ treachery is evident in Jesus’ words, “He who shared my bread has turned against me ( v. 18). A friend close enough to share a meal used that connection to harm Jesus. Each of us has likely experienced a friend’s betrayal. How can we respond to such pain? Psalm 41:9, which Jesus quoted to indicate His betrayer was present during the shared meal (John 13:18), offers hope. After David poured out his anguish at a close friend’s duplicity, he took solace in God’s love and presence that would uphold and set him in God’s presence forever (Psalm 41:11–12). ... Heavenly Father, I’m thankful that Yo

Plod On! 인내하며 꾸준히 걸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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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경말씀: 사사기 6:7-16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사사기 6:14] 하나님은 이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을 사용하기를 좋아하십니다. 윌리엄 케리는 1700년대에 아주 작은 마을에서 정식 교육도 거의 받지 못한 채 자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직업에서 크게 성공도 못하고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을 주시고 그를 선교사로 부르셨습니다. 케리는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를 배웠고, 나중에 신약성경을 뱅골어로 처음으로 번역했습니다. 오늘날 그는 “현대 선교의 아버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카에게 쓴 편지에서 그의 능력에 대해 겸손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인내하며 꾸준히 걸을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어떤 사역을 맡기실 때 하나님은 우리 능력의 한계와 관계없이 그것을 이룰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Am I not sending you?” Judges 6:14 God loves to use people the world might overlook. William Carey was raised in a tiny village in the 1700s and had little formal education. He had limited success in his chosen trade and lived in poverty. But God gave him a passion for sharing the good news and called him to be a missionary. Carey learned Greek, Hebrew, and Latin and eventually translated the first New Testament into the Bengali language. Today he is regarded as a “father of modern missions,” but in a letter to his nephew he offered this hum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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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나훔 1장 7-8절 7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8 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 하나님을 앞세워 살라 >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과 가르침을 대하고 많은 군중들이 수군거렸다.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그 수군거림을 듣고 기득권에 위협을 느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인들을 보냈다. 하인들이 가보니까 무리 중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참 선지자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고 했다. 그때 일부 사람들은 반박거리가 없자 지역성을 부각시켜 말했다.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그때 바리새인 중 하나인 니고데모가 말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사람을 무조건 거부하지 말고 사람됨과 언행을 보고 판단하자는 말이었다. 그 바른 말에 나머지 바리새인들은 할 말을 잃고 창피스런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지역성을 부각해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시켰다.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요 7:52).”  성경에는 니고데모의 출신지가 나오지 않지만 그가 갈릴리 출신이어서 예수님을 동향 출신이라고 옹호한 것이 아니라 정의와 양심의 소리를 따라 말한 것이었다. 인간 사회에는 지역성을 부각해 일반화의 오류로 자기 정당성을 변호하고 자기편을 만들려는 모습이 있다. 예를 들어 “남자는 다 늑대야. 여자는 다 여우야.”라는 식의 말이 일반화의 전형적인 말이다. 내가 상대 이성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상대 이성을 다 늑대나 여우라고 말할 권리는 없다. 일반화의 오류는 양심의 혼란과 삶의 무지를 낳는다.  바리새인들이 일반화의 오류에 빠져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오지 않는다.”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많이 나왔다. 엘리야, 엘리사, 아모스, 호세야, 요나, 나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