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18의 게시물 표시

올 인 신앙의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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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인 신앙의 축복 >  요한의 “주님이시다.”라는 외침을 듣고 베드로는 바로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렸다. 주님을 먼저 발견한 사람은 요한이었지만 주님을 향해 먼저 행동한 사람은 베드로였다. 이 장면은 ‘결단의 중요성’을 가르쳐준다. 신앙이란 과감히 주님을 향해 뛰어드는 것이다. 고민만 하고 계산만 하고 간만 보고 재보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없다.  축복 받으려면 개척 정신과 도전 정신을 갖추라. 믿음으로 은혜의 바다로 뛰어들라. 어렵고 힘든 일에 과감히 뛰어드는 사람이 큰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다. 역사상 위인 중에 우유부단한 사람은 없었다. 믿을 바에야 다부지게 믿으라. 다부지게 일하고, 다부지게 책임을 지라. 생각은 적고 행동은 많아야 한다. 단순하게 살아야 능력도 나온다.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정복할 때 성문 옆에 거대한 실타래가 묶여 있고 이런 글이 써 있었다. “누구든지 이 실타래를 풀면 세계를 지배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 실타래를 풀려고 애썼지만 다 실패했다. 알렉산더도 그 글을 보았다. 그리고 한 번 씩 웃더니 칼을 들어 단칼에 실타래를 끊어버렸다. 단순해야 한다. 좋은 삶의 모델을 선택했으면 그 모델에 올인 하라. 주님을 선택했으면 주님에게 올인 하라.  삭개오는 주님께 올인 했다. 그가 주님을 보고 싶어 돌 감람나무 위로 올라갔을 때 예수님은 삭개오를 보고 말했다. “삭개오야! 내가 오늘 네 집에 머물겠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자기 이름을 아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 이름을 안다.”는 말은 “나의 번뇌와 고통, 나의 갈증과 꿈과 기도제목도 안다.”는 말도 된다. 삭개오는 감격 중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께 올인(all in) 했다. “예수님! 제 소유의 절반을 구제에 사용하겠습니다.” 삭개오는 키는 작아도 영적인 키는 컸다. 배도 컸지만 배포는 더욱 컸다. 머리통도 컸지만 마음통은 더욱 컸다. 삭개오가 주님께 올인 하자 얼굴에는 천국 미소가 생겼고, 그는 증오와 멸시의

인생에서 후퇴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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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에서 후퇴도 필요하다 >  모세의 축복 유언에서 스불론 지파는 밖으로 나가는 진취적인 지파가 되는 축복 유언을 받고 잇사갈 지파는 정반대로 장막에 평안히 거하는 축복 유언을 받는다(18절). 하나님의 축복에는 스불론 지파의 축복처럼 전진해서 밖으로 나가는 축복도 있지만 잇사갈 지파의 축복처럼 후퇴해서 장막 안에 거하는 축복도 있다. 인생에서는 전진도 필요하지만 후퇴도 필요하다.  큰 그림을 그릴 때 화가들은 종종 뒤로 물러나 전체 그림을 본다. 그처럼 열심히 일한 후 종종 뒤로 물러나 인생 전체를 살필 줄도 알아야 한다. 뒤로 물러나는 것은 인생의 성숙과 전진을 위해 오히려 필요한 것이다. 열심히 일하면서 때로는 휴식과 휴가도 잘 가지라. 휴식과 휴가는 각종 집착을 극복하게 해준다. 사람은 자아와 성공과 일에 대한 집착을 극복할 때 참된 평안과 행복을 얻는다.  높은 산을 향해 열심히 올라가면 눈앞의 나무와 바위만 보이지만 잠깐 오르기를 멈추고 뒤를 돌아보면 저 아래에 시원한 장관이 펼쳐진다. 쉼도 없이 바삐 살면 불안과 허무와 우울함이 찾아온다. 그러므로 진취적으로 살면서도 가끔 쉬어주라.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스불론의 축복과 잇사갈의 축복이 겸비되어야 한다. 창조적인 아이디어는 대개 삶의 속도를 늦출 때 떠오른다. 가끔 늘어짐도 필요하다.  인류의 풍성한 정신문화는 정신없이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에 의해 형성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무 바쁘게 살지 말고 묵상시간과 기도시간을 반드시 내라. 가끔 자연으로 들어가서 숲속을 거닐고 산을 오르라. 가족여행은 건강한 가정을 위한 최상의 재료다. 사람은 가끔 느리게 행동해야 큰 재화를 창출할 수 있는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생긴다. 때로는 늦잠도 잘 필요가 있다.  살면서 때로는 느린 모습도 필요하고 뒤처진 모습도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친구를 앞세우기 위해 때로 한 발 뒤에서 전진하다가 친구가 뒤처지면 받아주고 보조를 맞춰준다. 얼마나 복된 마음인가? 때로는 빨리 전진하고 때로는 천천히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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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  요즘 <월새기(월간 새벽기도)> 발행에 필자가 전체 강해를 집필하는 주필로서 사례비를 받지 않고도 한 달에 상당한 재정적인 마이너스가 발생한다. 약 200페이지의 책을 한 권에 천 원 받으니까 판매수입은 재정운용에 큰 보탬이 안 된다. 게다가 박스비와 택배비까지 부담하고 <사랑나눔>으로 많은 책을 교정기관과 군대로 보내니까 후원자의 후원금을 포함해도 매달 상당한 마이너스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발행권수가 늘어나고 영어로도 번역되어 발행되면 마이너스는 더 커질 것이다. 경제적인 상식으로는 어리석은 일을 한다고 하겠지만 ‘선교’라는 것이 원래 그렇게 계산을 초월해서 하는 것이다. 은혜의 역사는 산술적으로만 펼쳐지지 않는다. 계산을 초월해 헌신해야 계산을 초월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산술적으로 생각하면 매월 상당한 마이너스니까 늘 걱정 가운데 지내야 하지만 별로 걱정하지 않고 행복하게 사역하고 있다. 그렇게 마이너스가 되면서도 행복하게 사역할 수 있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죽으면 죽으리라! 망하면 망하리라!”는 마음으로 사역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재원을 최대한 동원해 쓰다가 어느 때에 재원이 끊기면 “하나님의 뜻과 시간은 여기까지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시간표에 순종해 언제든지 <월새기> 사역을 끝내도 좋다고 편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째, 일시적인 마이너스만 보지 않기 때문이다. 비즈니스라면 마이너스가 걱정되겠지만 어차피 마이너스를 기쁨으로 감수하는 것이 바로 ‘선교’다. 최근에 분당 인근에 건축된 교회들을 보면 100억 원이 넘게 든 경우도 많다. 그런 재정 쓰임새와 비교해볼 때 100년 동안 월새기 사역을 하면서 100억 원이 든다면 그것은 큰 마이너스로 느껴지지 않는다. 또한 사실상 경제적인 인물 한 명만 나와도 그 정도 마이너스는 쉽게 해결된다. 문서선교 동참자 혹은 <월새기>를 통해 은혜 받은 독자 중 100년

당대와 후대가 복 받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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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단기 승부가 아니다 >  미국에 한 이민 목회자가 있었다. 30년 이민 목회를 했는데 인간적이고 외형적인 관점에서는 큰 성공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신실함을 보고 다른 측면에서 복을 주셨다. 그에게는 미술에 소질이 있는 자녀가 있었다. 자녀는 미대를 가고 싶어 했지만 좋은 미대를 가려면 돈이 많이 들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자녀도 미대 진학을 포기했고 목회자 부부는 미안한 마음으로 자녀의 앞날을 위해 더 기도했다. 자녀는 잠시 꿈을 접어야 했지만 인생 승부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느 날 그 자녀가 자기 소질을 살려 웹 만화를 유튜브 동영상으로 만들어 올렸다. 유튜브 동영상은 재미, 흥미, 묘미, 의미 등이 있으면 공짜로 구독 신청을 한다. 그렇게 올리던 동영상의 구독자가 크게 늘어나자 구글 회사도 인정하는 핵심 유튜버가 되어 상당한 수입을 올리게 되었다. 원하는 대학은 못 갔지만 원하는 일을 하면서 수입도 상상 이상으로 많으니까 자신도 행복해했고 그것을 지켜보는 부모도 행복해했다. 인생은 단기 승부가 아니다.  필자에게는 천국에 갈 때까지 동영상을 만들 수 있는 방대한 <성경강해>와 <네트영어> 콘텐츠가 있다. 팀을 잘 꾸리면 10분 분량의 <새벽기도> 동영상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평생 만들어 올릴 수 있고 50분 분량의 <네트영어> 동영상을 매주 하나씩 평생 만들어 올릴 수 있다. 특히 <새벽기도> 동영상은 영어로 잘 제작해 올리면 세계선교의 비전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필자는 그 비전을 향해 힘차게 달릴 것이다. 필자가 살아있을 때 그 비전이 멋지게 이뤄지면 좋지만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있지 않아서 단기간의 열매가 적어도 괜찮다. 인생은 ‘단기 승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전이 크고 찬란하면 ‘당대 승부’만도 아닐 수 있다. 필자가 이루지 못하면 필자의 후대나 후계자가 이루면 된다. 필자는 개척자 역할만 하다가 사라지고 좋은 후대가 나와

성도의 3대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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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택의 축복  본문 8절을 보라.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 둠밈과 우림의 재료, 모양, 사용법, 용도 등은 성경에 나오지 않아 잘 모른다. 아마 당시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사용한 도구로 추정된다. 그 둠밈과 우림이 경건한 레위 지파에게 있다는 말씀은 레위 지파가 하나님의 뜻을 묻고 백성들에게 알리는 제사장 지위를 얻게 되었음을 뜻한다.  선택된 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자부심도 되지만 사실상 그 일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다(벧전 2:9). 성도는 둠밈과 우림을 가진 존재다. 그래서 구별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려줄 책임이 있다. 제사장직은 권력을 가진 자리가 아니다. 선택된 존재가 되었다는 뜻은 권리가 커졌다는 뜻이 아니라 책임이 커졌다는 뜻이다. 구별된 존재로서 자부심을 잃지 않고 자기 자리를 묵묵히 지키면 언젠가 수직상승의 축복의 때가 반드시 온다. 2. 중보의 축복  본문 10절을 보라.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로다.” 당시 레위 지파에 주어진 중보의 직무는 크게 2가지 직무가 있었다. 하나는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교육의 직무’이고 또 하나는 백성들의 죄를 속함 받기 위한 ‘제사의 직무’다. 레위 지파는 이 2가지 직무를 이행하려고 이스라엘의 각 지파 사이에 흩어져 살았다.  사람은 죄 공장이다. 기회만 되면 죄의 습성이 나타난다. 죄를 회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끊임없이 말씀과 기도로 죄의 습성을 극복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 일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바로 제사장이다. 제사장은 말씀을 맡은 자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일 중의 하나는 말씀을 전해주고 말씀으로 교육하는 일이다. 그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은 목회자지만 모든 성

죄를 최대한 멀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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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란한 비전을 가지라 >  모세가 마지막 노래를 지어 백성들에게 들려준 그 날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했다. “너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에 올라가 느보 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49절).” 모세가 모압 땅에서 죽은 산과 관련해서 성경에는 아바림 산, 느보 산, 비스가 산 3곳이 나온다. 아바림 산은 아바림 산맥을 뜻하고, 비스가 산은 아바림 산맥에 있는 한 산을 뜻하고, 느보 산은 비스가 산의 최고봉인 802미터의 느보 봉을 뜻한다. 쉽게 말하면 아바림 산맥의 비스가 산의 느보 봉이다.  느보 봉에서는 요단강 건너편의 팔레스타인이 잘 보인다. 하나님은 임종 직전의 모세에게 802미터의 느보 봉에 올라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게 했다. 당시 모세가 임종 직전에 802미터의 산을 올라가기가 쉽지 않았겠지만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는 못해도 그리운 그 땅을 마지막으로 보게 하려는 조치였다. 그처럼 최후의 순간까지 약속된 미래인 가나안을 바라보라. 아무리 현재 상황이 좋게 펼쳐져도 안주하지 말고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더 나은 미래를 바라보고 한 발자국이라도 전진하려고 하라.  전진을 두려워하고 현실에서 안주하려는 자기를 이겨내라. 특히 리더는 더욱 가나안의 비전을 제시할 줄 알아야 한다. 가나안을 앞두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젖은 백성들을 최후까지 격려하려고 노구를 이끌고 느보 봉으로 올라서는 모세의 모습을 보면서 백성들은 얼마나 힘과 용기가 생겼겠는가? 세상에서 가장 이기기 힘든 대상 중 하나는 ‘자기’다. 자기를 이길 줄 알아야 남을 이기고 더 나아가 남을 이끌 수 있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능력 있는 사람’이지만 자기를 이기는 사람은 ‘권세 있는 사람’이다.  왜 자기를 이기기가 힘든가? 낯선 가나안 땅을 보면서 열정보다 두려움을 가지기 때문이다. 가보지 않는 곳과 길에서는 늘 두려움도 따른다. 가보지 않고 생각만 하면 두려움은 과장

An Enduring Happiness 오래 가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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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ever of you loves life and desires to see many good days . . . . Turn from evil and do good.  Psalm 34:12,14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시편 34:12, 14 Often we hear that happiness comes from doing things our own way. That, however, is not true. That philosophy leads only to emptiness, anxiety, and heartache. 행복은 자기 방식대로 사는데서 온다고 하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다만 공허와 염려와 마음의 고통에 이르게 할 뿐입니다. Poet W. H. Auden observed people as they attempted to find an escape in pleasures. He wroteof such people: “Lost in a haunted wood, / Children afraid of the night / Who have never been happy or good.” W.H. 오든이라는 시인은 쾌락에서 도피처를 찾는 사람들을 관찰하였는데, 그들은 “귀신 나오는 숲에서 길 잃은 사람들 / 밤을 무서워하는 아이들 / 행복하거나 좋았던 기억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The psalmist David sings of the remedy for our fears and unhappiness. “I sought the Lord, and he answered me; he delivered me from all my fears” (Psalm 34:4). Happiness is doing things God’s way, a fact that can be verified every day. “Th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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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별력과 지혜를 갖추라 >  미국의 한 작은 마을에 늘 지기만 하는 고등학교 미식축구팀이 있었다. 너무 지니까 격려 차원에서 마을의 한 부자가 엄청난 약속을 했다. “다음 게임에 이기면 선수들에게 차를 한 대씩 주겠다.” 선수들은 들떠서 7일간 황홀한 상태에서 맹렬히 연습했다. 마침내 결전의 날이 되어 선수들은 비장한 각오를 하고 시작되자마자 “와!” 하고 달려 나갔다. 그리고 38대 0으로 대패했다. 차에 대한 욕심이 영패의 원인이었다.  준비 없는 환호와 열정은 소동만 일으킬 때가 많다. 인생의 소동은 무분별한 감정 때문에 생길 때가 많다. 대표적인 무분별한 감정으로는 지나친 죄책감이 있다. 죄책감은 필요하지만 지나친 죄책감은 오히려 큰 부작용을 낳는다. 하나님은 이미 벌어진 행동보다 현재 마음의 중심을 더 살피신다. 첫눈에 반하는 감정적인 사랑도 너무 신뢰하지 말라. 참된 사랑은 시간을 두고 그 참됨을 인정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참된 사랑은 ‘반하는 것’의 개념보다 ‘공들인 것’의 개념에 가깝기 때문이다.  분노하는 감정에 대해서도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흔히 분노의 감정을 가진 것을 무조건 죄로 여긴다. 그러나 때로는 선한 목적을 위해 계획적으로 분노하는 경우도 있고 더 나아가 의로운 분노도 있다. 모든 분노가 다 죄는 아니다. 잘 조절된 계획적이고 의로운 분노는 오히려 필요한 것이다.  가장 분별력이 필요한 분야가 진리 문제와 관련된 분야다. 이단과 사이비의 언행을 잘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신비한 척하는 사람의 말은 주의하라. 억지로 거룩한 척 하고 영성이 있는 것 하는 모습도 요주의 대상으로 삼으라. 거짓 영성에 미혹되어 맹목적으로 따르면 소동이 예견된 무분별한 인생이 된다. 하나님을 믿을 때 분별력과 지혜를 갖추고 믿으면 어떤 상황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생긴다. <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으라 >  이스라엘이 지혜와 분별력을 잃고 하나님을 버림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34-35절)

다시 일어서서 전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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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혜를 잊지 말라 >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 힘들어도 감사하는 사람이다. 고통 중의 감사는 차원 높고 사려 깊은 감사다. 둘째, 좋을 때 감사하는 사람이다. 모든 일이 잘 풀릴 때 감사하는 사람이다. 그런 감사만 잘해도 기본은 된 사람이다. 은혜를 받고도 의외로 모른 척 하는 사람이 많다. 왜 성도는 감사가 넘쳐야 하는가? 그가 누리는 많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셋째, 힘들다고 불평하는 사람이다. 많은 일반인의 모습이 그렇다. 넷째, 좋아도 불평하는 사람이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삶은 가장 질이 안 좋은 삶이다.  사람이 가장 많이 짐승만도 못하다는 소리를 듣는 때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때다. 하나님도 은혜를 원수를 갚는 것을 가장 싫어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 참된 지혜와 부요의 원천이다. 가장 잘해야 할 일은 은혜를 기억하는 일이다. 은혜를 기억할 때 영적인 나태도 없다. 좋은 것은 저절로 습관화되지 않고 대개 훈련해야 습관화된다. 감사를 훈련해서 습관화시키라. 은혜가 감정 수준에서 머물게 하지 말라.  가장 잊지 말아야 할 은혜는 십자가의 은혜다. 힘들 때 무엇보다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해내라. 고통스런 환경만 바라보지 말고 해를 끼친 원수만 생각하지 말라. 예수님을 바라보고 생각할 때 신비한 용기가 생겨난다. 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에게 고난을 허락하는가? 은혜를 잊지 않는 존재로 훈련시키려는 뜻이다. 왜 이스라엘이 수시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는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잊고 우상숭배에 빠졌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은 우상숭배자를 멸망시키고 흩어서 사람 사이에서 기억에 없을 정도로 흔적 없이 끊어지게 했지만 그때 원수가 하나님의 심판이 마치 자기들의 힘 때문인 것으로 잘못 생각할까 염려하셨는데 그러면 원수들이 하나님을 우습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26-27절). 그 말씀은 이스라엘을 흩어서 그들의 흔적과 기억이 없게는 하셔도 완전히 멸절시키지는 않을 것이란 암시다. 즉 우상숭배는 철

하나님께 속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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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술과 요가를 주의하라 >  요새 교회 어린이나 학생부 행사에서 마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술은 성경도 금하고 있고 타락한 인간 본성을 자극해 우상숭배로 이끌 수 있기에 전도 수단으로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마술은 손재주나 도구를 통한 눈속임으로 감탄과 재미를 유발하기에 복음 및 교회와는 본질적으로 안 맞는 것이다. 전도한다고 고대 이방 신전처럼 교회에 창기를 둘 수 없듯이 전도 수단이 비성경적이고 비윤리적이고 불법적이면 안 된다. 전도 목적이 거짓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  마술이 주는 황홀한 자극과 충격에 익숙해지면 복음과 믿음과 말씀이 단순하게 느껴지고 거짓 환상과 체험을 추구하고 싶은 심리가 생기면서 영혼과 교회가 파괴될 수 있다. 목적이 바르면 수단도 발라야 한다. 성경은 인위적이고 화려하고 매력적인 현상보다 어리석게 보이는 십자가를 통한 복음 전파를 권고한다. 오락적인 무대 마술까지 배척할 필요는 없지만 오락은 오락 수준에 머물게 하고 교회 안으로는 끌어들이지 않는 것이 좋다.  요가도 마찬가지다. 요가는 단순한 운동보다 자기 인식, 수련, 완성, 합일을 목적으로 마음의 평정을 찾는 수행법으로서 힌두교나 불교의 뿌리다. 요가는 해탈을 위한 집중과 명상을 중시하기에 단순한 운동이 아닌 철학과 종교로서 인도인의 정신생활과 종교의 뿌리이고 신체나 정신 훈련을 빙자한 범신론적인 영성 훈련이다. 왜 영성 훈련 세미나를 주의해야 하는가? 이교적인 영성 훈련 방법으로 기독교를 변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요가는 건강과 다이어트를 위한 단순한 운동이나 스트레칭이 아닌 몸으로 하는 힌두교 종교 의식과 선교 수단이다. 교인이 운동 삼아 요가를 하고 명상과 관상에 빠지면 종교적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고 힌두교 영성에 젖어들기 쉽다. 요가는 종교 수행의 기본으로서 영성을 높여준다고 여기기에 기독교 영성을 주장하는 사람도 성령충만을 내세우며 무심결에 요가의 원리를 따라 신인합일의 이교적인 범신론에 빠질 위험성도 있다.  요가는 훈련,

사랑하면 영안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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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6장에는 이스라엘과 아람의 전쟁이 나온다. 그때 아람 왕이 엘리사를 잡으러 도단성으로 군사를 보냈다. 아침에 엘리사의 사환이 아람 군대가 성을 둘러싼 것을 보고 공포에 질려 있자 엘리사가 말했다. “걱정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다.” 그리고 엘리사가 기도하자 사환의 눈이 열려 불 말과 불 병거가 보였고 반대로 아람 군사의 눈은 닫혔다. 결국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대승을 거두었다. 영적 전쟁에서 중요한 승리 요건은 영적인 눈이 열리는 것이다.  문제만 보지 말고 문제 뒤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과 돕는 천사들을 보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보라. 영안이 열렸다는 것은 신기한 것을 본다는 것만이 아니다. 모든 것을 다 봐야 믿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신비로 감춰진 부분도 있어야 진짜 사랑이 생긴다. 사랑 자체가 신비다. 다 벗겨버려 신비가 사라진 사랑은 환멸이 될 수 있기에 하나님은 다 보여주지 않는다. 결국 영안이 열린 것의 더 중요한 의미는 보지 못해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대로 사는 것’이다.  본문에서 제자 중 제일 먼저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은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제자 요한이었다.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흥분된 소리로 “주님이시다!”라고 소리쳤다. 왜 7명의 제자 중 요한이 제일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았는가? 시력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언제 영안이 열리는가? 예수님을 많이 사랑할 때다. 사랑하면 얼굴도 빛나고 언어도 따뜻해지고 표정도 밝아지지만 무엇보다 영적인 시력이 좋아진다.  교회를 사랑하면 교회에 떨어진 휴지와 꺼진 전등과 후미진 곳의 거미줄이 잘 보이면서 조용히 교회를 위해 봉사한다. 배우자를 사랑하면 배우자가 원하는 것을 잘 알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잘 들리고 평범한 곳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이 보인다. 썬다 싱은 꽃을 보다 하나님을 만났다. 영안이 열리면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된다. 가시덤불에서도 하

Jesus Reached Out 예수님이 내미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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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mediately Jesus reached out his hand and caught him.  Matthew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마태복음 14:31 Sometimes life gets busy—classes are hard, work is exhausting, the bathroom needs to be cleaned, and a coffee date is on the day’s schedule. It gets to the point where I force myself to read the Bible for a few minutes a day and tell myself I’ll spend more time with God next week. But it doesn’t take long before I’m distracted, drowning in the day’s tasks, and forget to ask God for help of any kind. 때로는 생활이 너무 바빠집니다. 수업은 어렵고, 일은 힘들고, 화장실 청소를 해야 하고, 커피 데이트도 하루 계획에 들어있습니다. 억지로라도 하루에 몇 분은 성경을 읽으려 했다가도 다음 주에는 하나님과 시간을 더 많이 보내야겠다고 다짐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일에 파묻히다 보면 마음이 딴 데로 향하고 하나님께는 어떤 도움을 구하는 것도 다 잊어버립니다. When Peter was walking on water toward Jesus, he quickly became distracted by the wind and waves. Like me, he began to sink (Matthew 14:29–30). But as soon as Peter cried out, “immediately Jesus reached out his hand and caught him” (vv. 30–31). 예수님을 향해 물 위를 걸어가던 베드로는

순종이 가장 복된 자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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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SNS선교사 "사람 낚는 어부" ] < 순종은 축복의 제일 통로다 >  예수님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했을 때 제자들은 순종했다. 그러자 고기가 많이 잡혀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였다. 순종은 하나님의 능력을 흘러나오게 하는 수도꼭지와 같다. 순종하면 능력이 흘러나오고, 순종하지 않으면 능력은 그친다. 사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는 명령에서 ‘오른편’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가복음 5장에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했는데 그 장면에서도 ‘깊은 데’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다.  예수님이 왼편으로 가라고 하면 왼편으로 가고 얕은 곳으로 가라고 하면 얕은 곳으로 가는 순종이 중요하다. 순종하는 만큼 축복받고 순종하는 자녀가 더 사랑받는다. 편애는 나쁘지만 순종하는 자녀가 더 사랑받고 반항하는 자녀가 덜 사랑받는 것은 ‘편애’가 아니라 오히려 ‘정의’다. 예수님도 12제자 중 특별히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더 사랑했다. 순종은 축복의 제일 통로다.  인간은 똑똑한 것 같지만 어리석은 존재다. 어떤 사람은 건강을 위해 보약을 먹었는데 더 쇠약해져서 종합 진찰을 하자 보약이 체질에 맞지 않아 간이 녹아버린 것이었다. 결국 보약 먹고 2개월 만에 죽었다. 인간은 강한 것 같지만 약하다. 아무리 건강해도 병균 하나로 죽을 수 있고 아무리 강건해도 눈짓 하나, 말 한 마디로 마음이 무너질 수 있다. 강해보이는 사람도 때로는 한없이 약해진다. 나폴레옹도 귀가하면 고독과 외로움으로 아내 앞에서 종종 무릎 꿇고 울었다.  연약한 인간이기에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지만 만물 중에 가장 순종하지 않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예수님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했을 때 그 음성을 제자들뿐만 아니라 디베랴 바닷가의 큰 물고기들도 들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배 오른편으로 몰려들었고 제자들이 그물을 내리자 그 물고기들은 “주님! 우리는 죽도록

생각의 전환을 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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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이 없으면 나도 없다 >  한 증권회사 간부가 자살하며 유서를 남겼다. “얘들아! 사랑한다. 아빠는 지금까지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았다. 누구보다 빨리 승진했고 빨리 돈을 벌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사라진 지금 아빠는 너무 허전하다. 삶의 이유를 발견하지 못해 먼저 간다. 너희는 아빠처럼 살지 마라.” 빨리 성공하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예수님 없이 빨리 얻으면 그만큼 빨리 잃는다. 대박을 노리고 도박을 하면 대개 쪽박을 찬다.  한 청년이 가게를 열었다. 엄청난 손님이 찾으면서 전국에 30개 지점을 내며 대박을 쳤다. 그러다 선배와 강원랜드에 갔다가 도박에 빠졌다. 결국 도박 빚으로 사기를 쳤다가 쪽박을 찼다. 잘 나갈 때가 겸손해야 할 때다. 젊고 잘 나갈 때는 큰소리친다. “나는 늙어서 절대 자식 의지하지 않겠다.” 노인의 고독의 큰 고통을 모르기에 그렇게 말한다. 늙으면 그때는 자식이 한번 찾아와 주고 한번 전화해주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곧 그런 때가 온다. 자신을 자신하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다.  욥기를 통해 무엇을 배우는가? 첫째, 돈을 믿지 못한다는 것을 배운다. 돈은 순식간에 날아간다. 둘째, 배우자도 믿지 못한다는 것을 배운다. 헤어진 부부도 한때는 행복하게 살았다. 셋째, 자식도 믿지 못한다는 것을 배운다. 자식이 나보다 먼저 갈 수 있다. 넷째, 친구도 믿지 못한다는 것을 배운다. 참된 친구를 얻는 것은 늘 어렵다.  마지막으로 건강도 믿지 못한다는 것을 배운다. 건강을 자신하던 사람이 먼저 갈 때도 많다. 아무리 바쁘고 귀찮아도 가끔 건강진단을 받으라. 자동차도 1년에 몇 번은 점검하는데 더 중요한 몸을 그냥 방치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나 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국력을 위해서도 중요하고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소중한 생명을 귀찮음 때문에 소홀히하지 말라. 욥기를 통해 배우는 결론은 믿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예수님이 없으면 시체다. 예수님이

좋은 변화를 꿈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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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변화부터 추구하라 >  2000년에 한 신학교 제자가 “목사님! 목사님 글은 사장시키기 아까워요. 보다 많은 사람이 보도록 인터넷 말씀 사역을 해보세요.” 컴퓨터를 잘 못한다니까 그가 게시판 6개가 딸린 홈페이지를 만들어주고 게시판에 설교 원고와 칼럼을 올리기만 하라고 했다. 사이트 주소도 그의 제안으로 ‘요한복음 3장 16절(요삼일육)’을 나타내는 john316.or.kr로 정했다. 지금은 신실한 믿음을 나태는 기독교 암구호로 John316이 꽤 알려졌지만 당시에는 생소한 표현이었다.  그때부터 홈페이지에 거의 매일 설교와 글을 올렸다. 당시에는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의 다양한 SNS가 없어서 지금보다 홈페이지 방문자가 훨씬 많았다. 그렇게 방문자가 많아지면서 강해에 더 정성을 쏟았고 그 과정을 통해 강해가 체계적으로 축적되어 지금까지 성경 80% 가까이 끝낼 수 있었고 그 강해를 바탕으로 <온새기(온라인새벽기도)>와 <월새기(월간새벽기도)> 사역도 할 수 있었다.  필자의 홈페이지 방문자와 <온새기> 메일 회원은 상대적으로 목회자가 아주 많다. 일반인은 열성적인 회원도 몇 년 후에는 점차 사라지는데 목회자는 설교 준비에 참고하려고 계속 방문하는 편이다. 주 독자층이 목회자이기에 더 말씀 준비를 잘하려고 하고 파급력도 느낀다. 일반인 5천 명이 말씀을 보면 5천 명에게만 영향을 미치지만 목회자 5천 명이 말씀을 보면 그 목회자의 말씀을 듣는 성도가 평균 100명이면 일반인 50만 명에게 영향을 미치는 셈이다.  목회자를 통한 말씀 선교의 파급력을 느끼고 인터넷을 통해 세계선교의 비전도 가능하겠다고 여겨 2004년에 한때 영어로 인터넷 말씀 사역을 했다. 그때 미국 기독교 웹사이트 방문 랭킹 순위에서 꽤 높은 순위까지 올라갔었다. 그러나 영어로 글을 쓰고 댓글과 메일에 반응하고 사람을 관리하는 것 등에 시간이 많이 들어서 결국 1년쯤 후에 영어 말씀 사역을 포기했다. 그래도 언젠가 때가 되

예수님만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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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곁에 이미 계신 하나님을 느끼고 생각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다. 그때 낙심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곁에 와 계서도 알아보지 못했다. 누군가 나를 몰라주면 섭섭함을 느끼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주님을 몰라주었어도 더 가까이 다가와 그들에게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질문하셨다. 낙심해서 열패감에 빠진 제자들에게 와서 하신 예수님의 첫 질문은 이렇게 단순했다.  사람은 그 상황에서 “너희가 왜 옛날로 돌아갔느냐? 그렇게 나를 실망시키면 되느냐?”고 했겠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질문하면 제자들이 더 낙심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질책은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지 못함을 아셨다. 사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이미 질책도 다 들어 있다. 그 질문은 제자들이 고기를 잡았는지 확인하려고 물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이 아무것도 잡지 못한 사실을 아셨다.  그때 예수님이 그렇게 질문하신 것은 “나 없이 너희의 경험과 지식과 능력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깨우쳐주시려는 의도가 있으셨을 것이다. 그 질문을 하나님은 내게도 하신다. “아무개야! 네게 고기가 있느냐?” 삶을 평가하는 가장 위대한 기준은 이 질문이다. 하나님은 나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다. 내가 사는 가장 위대한 목적은 영혼의 고기를 많이 얻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늘 이 질문에 대한 정직한 대답을 추구하며 살라. 그 질문에 제자들이 “없습니다.”라고 했듯이 나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인생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없는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은 한 세대도 유지하기 힘들다. 많은 사람이 없어도 있는 척 하고 모르고도 아는 척 한다. 사람 앞에서는 그렇게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정직하라. 하나님 앞에서 높은 마음으로 “있습니다.”라고 하면 하나님은 없게 만드시고 반대로 낮은 마음으로 “없습니다.”라고 하면 하나님은 있게 만드신다.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닌 존재

A Hopeful Lament 소망이 있는 애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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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called on your name, Lord, from the depths of the pit.  Lamentations 3:55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예레미야애가 3:55 To visit Clifton Heritage National Park in Nassau, Bahamas, is to revisit a tragic era in history. Where the land meets the water, stone steps lead up a cliff. Slaves brought to the Bahamas by ship in the eighteenth century would ascend these steps, often leaving family behind and entering a life of inhumane treatment. At the top, there is a memorial to those slaves. Cedar trees have been carved into the shapes of women looking out to sea toward the homeland and family members they’ve lost. Each sculpture is scarred with marks of the slave captain’s whip. 바하마의 수도 나소에 있는 클리프톤 헤리티지 국립공원을 방문하면 역사의 한 슬픈 시대를 다시 보게 됩니다. 육지와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 돌계단으로 절벽을 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18세기에 노예들이 배에 실려 바하마로 끌려오면 이 계단으로 올라가 가족들을 뒤로 한 채 비인간적인 삶을 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정상에는 노예들의 기림비가 있습니다. 삼나무들에 새겨진 여인의 형상들은 바다를 향해 그 건너에 있는 고국과 잃어버린 가족들을 보고 있습니다. 조각들마다 노예 선장의 채찍을 맞아 생긴 상처가 새겨져 있습니다. These scul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