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018의 게시물 표시

죄 문제부터 해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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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샛길이 더 막힐 수 있다 >  인간은 다 약하다. 강하다는 사람도 다 약하다. 어떤 스턴트맨은 나이아가라 폭포를 세 번이나 떨어져 내리고 살아서 매스컴이 ‘죽음을 정복한 사나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그가 뉴욕 시내를 걷다가 꼬마가 먹다 버린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뇌진탕으로 사망했다. 세상에 아무도 자기 인생을 자신할 사람은 없다. 아무리 잘 나가는 사람도 막히는 길을 만난다. 내가 잘해도 남이 막는다.  가끔 자동차 사고 때문에 도로가 꽉 막힌다. 내가 아무리 운전을 잘해도 남이 사고를 치면 내 길도 막힌다. 나이 많은 회사원들은 가끔 이런 소리를 듣는다. “아직 안 미쳤어요?” 위에서는 호시탐탐 자르려 하고 밑에서는 밀치고 올라오니 속상한 일을 많이 당한다. 그냥 다니자니 속이 썩고 안 다니자니 처자식이 운다. 앞길이 잘 안 보이니까 미치기 일보 직전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머리 빠른 사람들은 정상적인 길로 가면 안 되는 줄 알고 요령을 피우고 샛길을 찾는다. 그처럼 너도나도 샛길을 찾으니까 나중에는 샛길이 더 막힌다.  지금 곳곳에 길이 막혀 있다. 왜 길이 막히는가? 근본 원인은 죄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개발하고 좋은 사상을 발굴해도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사람에게는 길이 없다. 공산주의도 처음에는 화려하게 등장했다. 산업혁명 후 많은 사람이 도시로 몰리며 품값이 크게 떨어졌다. 근로자는 노예처럼 일해도 살기 힘들었고 조금만 불평하면 그냥 쫓겨났다. 마르크스는 그 모습을 보며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겠다고 공산주의를 주창했다.  그렇게 출발되었기에 겉으로 보면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보다 더 인간미가 더 있어 보임으로 급속히 많은 사람들을 그 사상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는 경제적 불행의 근본 원인은 자본주의 때문이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의 죄 때문이다. 죄 문제를 처리하지 않으면 자본주의도 행복을 줄 수 없고 공산주의도 행복을 줄 수 없고 인간이 만든 어떤 종교나 윤리나 사상도 행복을 줄

말씀을 듣는 복된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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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종하는 마음으로 들으라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은 주님의 말씀과 뜻에 지나치게 상관하지 말고 순종하라는 말씀이다. 성경은 토기가 토기장이에게 “나를 왜 이런 그릇으로 만들었느냐?”고 힐문하지 못한다고 했다(롬 9:20-21). 교회에 동냥하러 온 사람이 돈을 적게 준다고 따지고 화를 낸다면 기가 막히는 일이다. 그처럼 어떤 일로 하나님께 불평하면 하나님도 기가 막히게 여기실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이 가장 공평하게 모든 상황을 허락하셨다고 믿고 감사하고 순종해야 한다.  모든 자연만물은 하나님의 프로그램대로 철저히 순종한다. 유독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인간만이 반항한다. 만약 사람이 자연만물처럼 100% 순종하면 성경에 나오는 무수한 기적이 내 기적이 될 수 있다. 돈 유무(有無)나 배경과 인맥 유무보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 유무가 가장 큰 축복의 관건이다. 순종한다고 당장 역사가 일어나고 상황이 바뀌지는 않을 수 있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묵묵하게 나가면 하는 일마다 있는 곳마다 복된 역사가 나타난다. 2. 증인이 되려고 들으라  사도 요한은 자신이 요한복음을 기록했으면서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24절). 그처럼 자신을 죽여야 참된 증인이 된다. 증거인 되려면 말씀을 먼저 실천하라.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으면서 복 받고 형통한다는 구절에 형형색색으로 밑줄을 그어 놓았다. 진짜 복을 받으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구절들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 무엇을 얻으려고 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 믿는다는 것은 ‘얻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다. 얻으려고 하면 적이 많아지지만, 되려고 하면 자신만 이기면 된다. 내가 바로 되면 사는 길도 무수히 열린다.  신앙이란 ‘얻는 작업’이 아니라 ‘되는 작업’이다. 진짜 사는 길은 ‘많이 얻는 삶’에 있지 않고 말씀을 따라 ‘바로 되는 삶’에 있다. 내 뜻을 포기하고 말씀대로 살면 가장 복된 인생이 되지만

말씀을 잘 들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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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복과 부흥의 원천 >  성경 느헤미야 8장에는 워터게이트(수문) 앞 부흥사건이 나온다. 그 부흥의 원천은 하나님 말씀이었다. 느헤미야 8장 1절을 보면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에게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요청했다. 그리고 워터게이트 앞 광장에 모여 새벽부터 정오까지 성경만 읽는데 모든 백성이 그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3절). 오늘날 그렇게 하면 아마 오전 8시만 넘어도 10%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말씀에 대한 목마른 갈증이 있었다. 그들은 서서 말씀을 들었다(7절). 거의 7시간을 서서 말씀을 들으면서도 말씀을 경청했고, 그 다음날에도 말씀을 듣기 위해 에스라 앞에 모였다(13절). 그처럼 말씀에 대한 갈증이 있는 곳에 부흥과 축복이 있다. 한 교회의 영적 수준과 한 영혼의 영성은 “말씀을 어떻게 받느냐?”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때 에스라가 율법책을 펴자 모든 백성이 일어섰다(5절). 그리고 에스라가 하나님을 송축하자 백성들은 “아멘! 아멘!”하고 화답했다. 그처럼 말씀에 아멘의 심령으로 화답하고 말씀의 권위를 높이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만, 말씀을 우습게 알면 아무리 그럴듯하게 신앙생활을 해도 하나님의 역사는 없다. 말씀을 높임으로 하나님을 높이면 나도 높임 받는다. 누가 내 말을 잘 들으면 “그가 나를 높여주는구나.”라고 생각한다. 말을 잘 듣는 것은 인격을 높여주는 표시이듯이 하나님 말씀을 잘 듣는 것은 하나님을 높이는 가장 중요한 표시다.  말씀은 분석하는 것이 아니고 양식으로 삼는 것이다. 비행기가 어떻게 나는지 몰라도 비행기를 믿고 타면 목적지까지 간다. 갈색 소가 푸른 풀을 먹고 어떻게 하얀 우유를 만드는지 그 원리는 몰라도 우유를 먹으면 그것이 내게 에너지가 된다. 그처럼 성경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내 이성보다 크고, 우주의 모든 비밀을 알고 계신 하나님이 주셨기에 말씀을 높여 살기로 결심하면 그때부터 말씀은 능력의 원천이 된다. < 말씀을 잘 들으라 >  복음서를 보면

자기 가능성을 인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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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을 인정해주라 >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을 다른 길로 가게 해도 너는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22절). 내 사명도 인식해야 하지만 남의 사명도 인정해주라는 뜻이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 있어 창조된 존재다. 그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남을 인정해줄 때 나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다.  우월감을 버리라. 내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되 남의 것까지 내 구미에 맞춰 뜯어고치겠다고 하지 말라. 조용히 기도하는 사람은 소리 내어 기도하는 사람을 인정해주고 소리 내어 기도하는 사람은 조용히 기도하는 사람을 인정해주라. 엑셀형 사람도 필요하고 브레이크형 사람도 필요하다. 조용한 사람도 필요하고 요란한 사람도 필요하다. 내가 남처럼 될 필요도 없고 남을 나처럼 만들 필요도 없다. 남의 부족한 점이 보이면 내가 그 점을 메워주면 된다.  남을 인정해주고 나를 낮추는 겸손은 사람에게는 매력적이지 않아도 하나님께는 매우 매력적이다. 사람들은 열심히 자기 PR을 해야 뜬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남 PR을 해줄 때 더 뜨게 하신다. 나를 낮추고 남을 높여주면 낮아지고 손해인 것 같지만 하나님이 높여주신다.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지 말라.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도 그 속에 보석이 감추어져 있다. 고운 마음으로 남을 소중하게 보고 남의 장점을 기쁘게 인정해줄 때 하나님의 인정과 축복이 따라온다.  남을 인정하되 사람을 바라보며 살지 말라.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살라. 주님께 ‘올인’하라. 자신을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에 온전히 던질 때 하나님의 마음을 얻고 능력 있는 기도를 드릴 수 있고 내 안에 숨겨진 보화가 드러나면서 놀라운 축복의 열매들이 맺힌다. 초본 식물인 대나무가 높이 자랄 수 있는 이유는 마디 때문이다. 연약해 보이는 사람도 고난의 때를 주님 바라보고 잘 통과하면 그것이 마디가 되어 큰 인물로 자란다. 주님께 올인 하고 주님이 기뻐하는 존재가 되면 누구보다 복된 사람이다. < 자기 가능성을 인정하라

복된 청지기가 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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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된 청지기가 되는 길 >  성도는 욕망을 잘 절제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돈과 권력을 평안과 평화의 도구로 쓰지 않으면 나중에는 더 많이 잃는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삶은 복을 잘 활용하지 못해 저주로 만드는 삶이고 제일 고독한 삶은 복을 나눠줄 곳이나 나눠줄 사람이 없는 삶이다. 열심히 돈을 벌었는데 그 돈을 잘못 사용하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그때까지 돈을 벌려고 투자했던 시간은 어디서 보상받는가? 부자에게도 언젠가 고독한 순간이 찾아온다. 열심히 부를 쌓고 한숨을 돌릴 때쯤 다가오는 것은 이웃의 칭송보다 이웃의 시기다.  부를 지켜야 하는 고통도 크다. 신경 쓸 일이 많아 불면증이 생기기도 한다. 전도서 기자의 고백대로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지만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한다(전 5:12). 부를 지키는 고통보다 이웃의 시기 대상이 되는 고통은 더 크다. 결국 심한 피해의식으로 주변과 담을 쌓으면서 고독해진다. 어떻게 그 고독을 벗어나는가? 복을 나눔으로 이웃을 친구로 삼을 때다. 많은 소유보다 많은 친구가 소중하다. 결국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는 부자는 고독의 가능성을 잘 극복한 위대한 부자가 된다.  “얼마나 잘 버느냐?”보다 “얼마나 잘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 의미 있게 쓸 줄 모르면서 돈을 버는 것은 탐욕이지만 의미 있게 쓰면서 돈을 버는 것은 소명이다. 그런 소명의식을 가지라. 참된 행복은 욕망의 충족보다 소명의 충족을 통해 온다. 성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소명적인 목적을 이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그런 복된 청지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맡은 사명을 잘 관리하라  본문의 청지기는 주인 대신 재산과 종을 관리하는 리더 종을 뜻한다. 그가 맡은 사명은 진실과 지혜로 주인의 가정을 잘 꾸리고 하위 종들을 관리하며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일이다. 그 일을 잘 감당한 청지기는 복이 있어서 결국 주인이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

자기를 극복하며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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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를 극복하며 살라 >  인생은 바둑과 같다.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다. 한번 졌다고 그만두면 바둑이 늘 수 없다. 한판 지면 다음 판에 이기면 된다. 실패가 있어도 너무 빨리 포기하지 말라. 얼굴에 철판을 깔 때도 필요하듯이 마음에 철판을 깔 때도 필요하다. 시련과 상처가 있어도 “그래도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고 하라. 한 번의 실패로 나를 단정하지 말라. 내 마음을 붙잡으라. 이렇게 기도하라. “하나님! ‘내 안의 나’가 무너지지 않게 하소서!” 인생 최고의 적은 내 안에 있다. 적을 밖에서 찾으면 다 적이 된다. 배우자도 나를 힘들게 하는 적이 될 수 있다.  남 때문에 속상할 수는 있지만 적을 밖에서 찾지 말라. 내 마음과 생각을 지키지 못하면 다 적이 될 수 있다. 남을 정복하는 능력보다 나를 정복하는 능력을 구하라. 원수는 배우자, 자녀, 부모, 시부모가 아니다. 진짜 원수는 나 자신이다. 남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나를 바꾸려고 하라. 모세가 40년간 기도해도 바로는 변하지 않았다. 출애굽의 축복은 바로가 변해 얻은 것이 아니라 모세가 변해 얻은 것이다. 내가 변하면 저주가 축복이 되고 원수가 친구로 변한다.  한 목회자가 한때 “나사렛 예수!”하고 벌떡 넘어지게 했다가 어느 날부터 그런 목회를 포기했다. 일부 교인들은 “왜 목사님이 옛날처럼 능력을 보여주지 않나?”라고 불평했지만 넘어진 사람들이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난 후에는 다시 옛날과 똑같이 행동하자 그 모습에 회의를 느껴 “내 생애에 다시는 그 짓을 안 한다.”고 결심했다.  마음의 변화가 중요하다. 능력이 있어도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조롱 대상이 된다. 반면에 마음이 변하면 “그 삶이 부럽다. 존경스럽다.”고 하며 보는 사람도 믿음을 추구한다. 능력보다 마음의 변화가 중요하다. 마음이 못된 사람이 능력 받으면 더 큰 불행을 초래한다. 성도의 가장 큰 과제는 자기를 극복하고 마음의 변화를 이루는 것이다. < 자신감을 가지라 >  베드로가 “십자가

하나님을 아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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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듣고 깨달으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들에게 깨달으라고 하기 전에 먼저 제사장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셨다(1절). 제사장들이 백성들을 잘 가르치지 못한 것은 그들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왕족들에게도 귀를 기울이라고 했다. 정치 리더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깨달아서 백성들을 잘 인도해야 한다는 뜻이다.  순종은 잘 듣는 것에서 시작된다. 청력으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으라. 청력으로 듣는 것은 hearing이고 마음으로 듣는 것은 listening이다. 리슨(listen)을 잘할 때 레슨(lesson, 교훈)을 얻는다. 하나님의 말씀도 잘 듣고 리더의 말도 잘 듣고 서로의 말도 잘 들으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말을 무조건 듣지 말고 존중하며 들으라.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말도 무조건 듣지 말고 사랑하며 들으라. 공동체 영성이란 혼자만 소리를 내지 않고 남의 소리도 들으며 살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남의 말을 들을 줄 알 때 하나님의 음성도 잘 들리고 하나님도 더 많이 알게 된다. 많이 말할수록 깨달음의 지혜는 줄어들고 많이 들을수록 깨달음의 지혜는 늘어난다. 입이 발달하면 자기 확장 능력이 커지면서 불화도 낳지만 귀가 발달하면 자기 극복 능력이 커지면서 조화를 낳는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에 열린 귀를 가지면 하나님을 더 많이 알게 되면서 자기 극복 능력은 현저하게 커진다. 2. 죄를 고백하라  패역한 우상숭배자는 생명을 파괴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2절). 그 심판을 피하려고 죄악을 숨기고 선을 가장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죄를 숨길 수 없다(3절). 음란한 행위가 이스라엘의 회개를 막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된다(4절). 음란한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넘치려면 하나님만 바라보고 우상숭배를 멀리해야 한다.  죄의 고백은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는 입구다. 고백을 막는 것은 교만이다. 내 탓은 고백을 낳고 남

남는 것은 믿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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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을 알라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넘치려면 하나님만 바라보고 우상숭배를 멀리해야 한다.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가? 성경을 통해 알 수 있고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기본적인 것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하는 만큼 알고 깨닫는다. 사랑이 식어지면 아는 것이 크게 줄어든다. 하나님을 힘써 알려면 힘써 사랑하라. 사랑은 상대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 중심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신앙의 초점이 내 문제, 내 기도제목, 내 기분, 내 비전, 내 성공에 맞추어지면 아무리 성경을 연구하고 말씀을 많이 들어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을 알려면 내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생각이 많고 내 기분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살피고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라. 영적으로 철이 들어야 한다. 왜 자녀에게 철들지 않았다고 말하면 굉장히 기분나빠하는가? 그 말을 오해해서 “나도 알 만큼 다 알고 머리가 다 컸다. 부모님은 나보다 무엇이 나은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철들지 않았다는 말은 지식이 없다는 말이나 물정을 모른다는 말이 아니다. 남을 생각하는 것보다 나를 생각하는 것이 크다는 말이다. 나도 위해야 하지만 나를 위하는 마음이 남을 위하는 마음보다 50% 이하가 되어야 철든 것이다. 부모는 자녀를 위한다. 그 위하는 방법이 잘못되어 자녀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별개 문제다. 방법이 어떻든 부모는 자녀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한다. 그처럼 자녀도 부모를 위하고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자녀에게 부모를 위하고 생각하는 마음이 없다면 아무리 머리가 좋고 많이 알아도 철들지 않은 것이다. 철들지 않으면 부모의 심정을 알 수 없다. 인격관계에서는 사랑하는 만큼 상대방을 알게 된다. 특히 나보다 남을 더 위하려고 하는 만큼 그를 알게 된다. 하나님을 진정 알고자 하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려

풍성한 삶을 추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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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을 위해 지켜야 할 것 >  행복을 위해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첫째, 입술이다. 본문 15절에 있는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씀이다. 당시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계시하셨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거짓된 입술로 영성을 자랑하고 미혹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스스로에게도 큰 위험이 된다. 입술이 무너지면 자신의 존재 자체도 무너진다. 입술을 감사와 찬양이 넘치게 하고 특별히 기도하는 입술로 만들라.  둘째, 품성이다. 이스라엘이 완강한 암소처럼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넓은 들에서 어린 양을 먹이시듯이 풍성하게 먹이시지 않는다(16절).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온유와 겸손으로 자신의 품성을 지켜야 지경이 넓혀지는 풍성한 은혜와 축복이 주어진다. 품성 얘기를 하면 어떤 사람은 유교의 도덕주의를 연상한다. 그러나 그런 비판이 있다고 해서 품성의 중요성을 외면하지 말라. 믿음이 좋으면 품성도 좋아져야 한다. 명성은 날개처럼 일시적인 것이지만 품성은 뿌리처럼 지속적인 것이다.  셋째, 믿음이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빠진 에브라임을 버려두라고 말씀했다(17절). 에브라임은 북  이스라엘의 대표성을 가진 지파다. 우상과 연합한 이스라엘의 완악함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버릴 것이란 말씀이다. 하나님의 버림은 완전한 버림이 아닌 깨달음을 주시려는 일시적인 버림이다. 결국 하나님이 잠시 버리시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말라. 지금 막힌 길이 나중에 보면 더 복된 길이 될 때도 많다. 그러므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란 고백을 가지고 믿음을 굳게 지켜나가라.  넷째, 사명이다. 호세아 당시 이스라엘은 술에 취해 음행하면서 부끄러운 일을 좋아했다(18절). 결국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자기 사명을 소홀히 했기에 바람에 날려 사라지듯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했다(19절). 그

치유에 필요한 4대 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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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수를 함부로 받지 말라 >  얼마 전 한 대학병원에서 임의로 병실을 다니며 의료진의 눈을 피해 안수기도를 해준다는 여자 목사가 있었다. 병들어 지푸라기도 잡고 싶은 심정일 때 안수기도 해준다는 말에 미혹되면 진짜 지푸라기를 잡고 영혼도 망칠 수 있다. 아무에게나 기도 받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더 나아가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라는 행동적인 선언인 안수를 받는 것은 더 위험한 일이다. 안수자에게 욕심이나 영적 교만이 있고 심지어 영혼을 종으로 부리려는 사탄적인 의도가 있다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구약 성경을 보면 안수는 남발되지 않고 극히 제한된 경우에만 행해졌다. 모세오경에만 나오는 안수 기록도 대부분 제물에 대한 안수 기록이지 사람이 사람에게 안수하는 기록은 저주한 죄인을 죽일 때(레 24:14), 레위인을 성막 봉사자로 성별할 때(민 8:10), 모세가 죽기 전에 여호수아에게 리더십 이양을 위해 안수한 것 외에는 거의 전무하다. 예수님도 안수를 남발하지 않았다. 4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안수 기록이 몇 번 없고 요한복음에는 한 번도 없다.  거짓 목자나 거짓 능력자는 안수를 남발하는지를 보면 금방 구분된다. 체육관 집회에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치유한다면서 뛰어다니며 안수를 남발하고 심지어 넘어뜨리기까지 하는 것은 비성경적이고 몰상식적인 행동이다. 그 모습에서 사랑의 흔적이나 성령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왜 그렇게 안수를 남발하는가? “아무나 걸려라. 아무나 코에 꿰여라.”는 식이다. 안수를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  안수는 “이 손길은 하나님의 손길을 대는 것입니다.”라는 행동 고백이다. “남이 하니까 낫든지 말든지 나도 그냥 손을 대본다.”라는 마음으로 안수를 남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게 하는 행동이 될 수도 있다. 디모데전서 5장 2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말했다.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참된 안수라면

행복은 십자가에 좌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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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만 바라보며 살라 >  결혼 9년 만에 임신한 임산부가 있었다. 그녀는 임신하면서 허약증세로 시달리며 가끔 헛것을 보았다. 그때 기도해준다고 찾아온 전도사가 산모에게 귀신이 붙었다고 했다. 그 후 11년간 수없이 귀신 쫓는 의식을 행하며 귀신 공포증에 시달려 살았다. 어느 날, 성경을 보며 믿음이 생겼다. “귀신이 찾아와 죽이겠다면 죽이라고 하지. 그래도 나는 주님만 바라볼 거야.” 그 한 마디 고백으로 11년 만에 귀신 공포증에서 해방되었다.  잘못된 말 한 마디가 사람을 무섭게 죽일 수 있고 확신을 주는 말씀 한 마디가 사람을 거뜬히 살릴 수 있다. 사람은 참으로 약한 존재다. 강한 사람도 알고 보면 약하다. 옛날 유명한 권투 선수인 알리는 늘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고 떠벌였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떠버리’였다. 나중에 그가 고백했다. “시합 때마다 두려워서 그렇게 떠벌였습니다.” 사람이 다 약한 존재이기에 하나님에 대한 확신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큰 시련이나 문제나 사탄의 공격이 있어도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말라.  사람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다. 아무리 대단한 존재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그날로 끝장난다. 일의 성취를 위해 아무리 사람이 많은 것을 준비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일이 성취된다. 하나님이 축복해주셔야 축복 받고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셔야 길이 열린다. 그래서 예배와 기도가 중요하다. 예배와 기도가 없으면 꽃이 꺾인 것처럼 처음에는 괜찮은 것 같아도 점차 그 영혼은 시들고 축복의 문도 닫힌다. 더 나아가 십자가를 지라.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영광의 길을 따른다.”는 말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따른다.”는 말이다. 마태복음 16장 24절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존재는 어디에 가든지 십자가를 지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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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라 >  피조물 중 자존심을 가진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 자존심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자존심이 강한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나쁜 것은 ‘자존심만 강한 것’이다. 자존심이 강한 삶은 책임의식, 교양, 열정, 도전정신을 보이지만 자존심만 강한 삶은 우월감과 열등감을 오가고 없으면 좌절하고 있으면 잘난 척 한다. 자존심만 강하게 되지 말고 자존심이 강하게 되라.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고 힘들어도 기가 꺾이지 않고, 환란을 당해도 힘을 잃지 않고, 늘 자신에게 주어진 분수의 복을 감사하며 사명을 따라 살라.  어떤 사람은 사소한 것으로 자존심이 상한다. “나를 보고도 모른 척 했다.”고 자존심이 크게 상하기도 한다. 살다보면 서로를 제대로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것으로 쉽게 자존심이 상할 필요는 없다. 쉽게 자존심이 상하는 사람은 자존심이 강한 것이 아니라 자존심이 약한 것이다. 진짜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믿는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사명을 따라 살지 못해서 욕을 먹고 불신자의 눈총을 받는 것이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시시한 것에 매여 잘난 척 하고 치사하게 사는 사람과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고 사명을 따라 겸손히 사는 사람이다. 돈이 많고 인물이 잘나고 많이 배웠다고 목에 힘을 주면 누구도 존경하지 않지만 돈이 많고 인물이 잘나고 많이 배웠어도 교회에서 묵묵히 설거지를 하며 섬기는 자세로 살면 그 겸손한 믿음을 보고 누구나 존경한다.  성도는 사는 세계가 달라야 한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신 것을 감격하며 천국 소망을 가지고 세상 것을 부러워하지 말라. 세상 것을 많이 가진 사람이 부러울 때도 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주님이 주신 더욱 소중한 것들을 외면하고 잠시 그것에 한눈을 팔았던 것을 회개하라. 불신자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를 긍휼히 여기라. 죽을 때까지 “나는 주님 한분만으로 족하다.”고 고백하며 살라.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삶’을 따르고 ‘주님의 뜻’을 따르며 천국 갈

사명적인 삶의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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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명적인 삶의 축복 >  사명을 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버리는 것과 같다. 사명을 주는 이유는 축복을 주기 위해서다. 사명을 따라 살면 어떤 축복이 주어지는가?  첫째, 사람을 주신다. 주는 마음으로 살면 많은 좋은 친구를 얻는다. 그 친구들이 나중에 인생 위기의 순간에 큰 도움이 된다. 자린고비처럼 살면 재산은 생겨도 재산보다 귀한 친구는 얻지 못한다. 나눌 줄 알아야 친구도 얻는다. 나누는 삶만큼 복된 삶은 사명을 따르는 삶이다. 사명을 따라 살면 하나님이 사명을 이룰 수 있는 친구를 붙여주신다. 인복이 있다는 사람을 보면 대개 사명에 충실한 사람이다. 사명에 충실하면 하나님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붙여주신다.  둘째, 물질을 주신다. 사명을 따라 살면 하나님은 사람뿐만 아니라 물질도 주신다. 물질을 추구하며 살면 오히려 물질을 얻지 못하고 사람을 추구하며 살면 오히려 사람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사명을 따라 살면 물질도 얻고 사람도 얻는다. 선교 사명에 힘쓰면 물질도 주어진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선교에 쓰임 받는 개인이나 민족은 늘 복을 받았다. 역사상 나라가 힘 있게 뻗어갈 때는 열심히 선교할 때였다. 선교 마인드를 가지고 힘써 나눔의 삶을 실천할 때 나눌 수 있는 물질적인 능력도 얻는다.  셋째, 좋은 성품을 주신다. 옛날부터 장수, 부, 권세, 건강, 그리고 자식 많은 것을 5대 복이라고 했지만 진짜 복은 정의감, 사명감, 책임감 등 정신적인 면이 풍성한 것이다. 사명이 있으면 정신적으로 건강해지고 매사에 자신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살게 되고 고난이 있어도 마음이 넉넉해진다. 사명 받은 존재는 고난조차 하나님의 선한 섭리로 이루어진 것을 믿기 때문이다. 사명이 없으면 상처와 불행은 크게 느껴지고, 사명이 있으면 상처와 불행은 작게 느껴진다. 사명감을 가지고 살면 정신적으로 건강해지고 시야도 넓어지고 성격도 좋아진다.  넷째, 건강을 주신다. 육신의 건강은 마음의 건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마음의 건강은 자기의 존재

어디서든 필요한 존재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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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서든 필요한 존재가 되라 >  마태복음 21장을 보면 주님은 나귀를 쓰실 때 “나귀를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고 말씀했다(마 21:2). 무엇이든지 풀어 주님께 끌고 가야 주님이 쓰신다. 내게 주어진 것을 주님을 위해 쓰지 않으면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나의 물질과 건강과 시간과 재능을 풀어 주님께 끌고 가면 인생도 같이 풀리지만 그것들을 내게 그냥 묶어두면 인생도 같이 묶인다.  나귀 새끼도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자 주님을 위해 크게 쓰임 받았다. 큰 것을 만들어 주님께 드리려 하지 말고 작은 것이라도 먼저 주님께 매이게 하라. 크게 받아 일하는 것이 아니다. 크게 일하면 크게 받는다. 가만히 앉아 묶여 있으면 쓰임 받지 못한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할 때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저를 쓰소서.”라고 할 때 행복의 문도 열린다.  어떤 성도가 고백했다. “제가 이제까지 행복을 위해 수많은 일을 했지만 가장 행복했던 때는 몸이 힘들 정도로 주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할 때였습니다.” 그 고백은 모든 성도의 고백이다. 살면서 가장 보람된 때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와 교회와 가정에서 아직도 필요한 존재구나, 쓸모가 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할 때이다. 반대로 가장 비참한 일은 “너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다.”라고 여겨질 때다.  어디에 가든지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라는 말을 듣는 복된 존재가 되라. 사명감이란 “나는 어디에 필요한 존재인가? 내가 어떻게 쓰임 받는 인생이 될까?”를 자각하는 것이다.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사는 삶이 건강한 삶이다. < 사랑에 매이면 사명에 매인다 >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명을 도전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랑을 회복시키고 바로 이어서 사명을 도전하셨다. 사랑의 회복은 사명의 회복으로 연결된다. 사명이 없는 사랑은 진짜 사랑이 될 수 없고 책임감이 없는 사랑도 진짜 사랑이 될 수 없다. 목숨 걸고 사랑하고 목숨 걸고 사명

인생을 속단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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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 버티면 살아진다 >  지난 11월 2일 새벽 2시 31분에 경기도에 사는 33살 엄마가 3살 아이를 담요로 감싸 안은 채 제주도에서 묵던 모텔 숙소를 나와 택시를 탔다. 그리고 2시 47분에 용담 해안도로에서 내려 바닷가로 난 계단으로 내려갔다. 2일 후 거기서 서쪽 15킬로미터 떨어진 애월읍 갯바위에서 아이 시신이 발견되었고 5일 후 거기서 동쪽 5킬로미터 떨어진 제주항 방파제에서 엄마 시신이 발견되었다. 무슨 이유인지 같은 해류가 두 모녀의 시신을 정반대로 갈라놓았다.  제주도로 올 때 엄마는 어린이집에서 딸아이를 찾아 비행기로 왔다. 아이는 엄마랑 바다 본다고 비행기에서 마음이 설렜을 것이다. 만 3세가 넘으면 비행기 타고 여행가는 상황을 의식할 수 있다. 그런 예쁜 아이를 죽음의 길에 동반하는 것은 아무리 힘들어도 해서는 안 되는 가혹한 일이다. 가슴 아프지만 모방 사례가 없도록 꼭 말해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자살도 일종의 살인이고 자녀를 동반한 자살은 더 가혹한 살인이란 사실이다.  자녀는 부모 소유물이 아니다. 아무리 삶이 힘들어도 자녀의 생사를 부모가 주관할 권리는 없다. 제3자가 가슴으로는 “얼마나 엄마가 힘들었으면....” 하고 동정할 수 있지만 아이 본인이 뚜렷한 의식 가운데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면 “왜 엄마 힘들다고 저까지 죽여요?”라고 항변했을 것이다. 두 시신이 같은 해류에도 180도 정 반대로 한참 멀리 흘러가 발견된 것은 죽은 아이의 무언의 항변이었을지도 모른다.  따뜻한 가슴으로 그 안타까운 현실을 이해하려는 제3자는 “아이가 남의 노예처럼 사는 것이 염려되어 그랬을 거야.”라고 동정하지만 그 염려도 속단이다. 그 아이가 멋진 반전의 인생을 얼마든지 이룰 수 있다. 그런 패배적인 생각을 부정하는 사례가 무수히 많다. 각자의 삶이 주어진 이유와 목적이 있다.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자녀 목숨을 허망하게 끊으면 안 된다. 자기 운명과 자녀 운명은 다르고 자기 미래와 자녀 미래도 다르다. 자기와 자

원수같은 과거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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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 사랑은 절대 능력을 준다 >  성도의 첫째 사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지만 둘째 사명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내 양을 먹이라.”는 말은 결국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랑고백을 받은 후 바로 양떼를 먹이라고 하셨는가? ‘예수님 사랑’은 ‘양떼 사랑’과 같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사람도 사랑하고 존중하라. 최고 인격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인격이다. 천하를 얻고도 사람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사람을 무시하면 내 가치도 떨어지고 하나님도 외면하신다.  하나님의 관심 중의 관심은 사람이다. 잘 믿을수록 나타나는 것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다. 자녀를 양육할 때 가장 많이 가르쳐야 할 것은 사람을 존중히 여기는 태도다. 친구를 무시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로 자녀를 즉시 야단치라. 어렸을 때 그런 태도를 고쳐주지 않으면 커서는 더욱 버리기 힘들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된다. 사람이 가장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사람을 무시하는 일이다.  이웃을 나무로 알고 그의 땅이 되어주라. 이웃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평안을 전해주는 소중한 이웃이 되라.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다.”는 속담대로 살지 말고 종로에서 뺨을 맞아도 한강에서 화풀이하지 말라. 직장에서 야단맞았어도 집에 와서는 미소를 지으라. 그렇게 남을 배려하며 살 때 축복 그릇이 커진다.  예수님의 세 번의 질문은 같은 것 같지만 엄밀히 보면 다르다. 예수님이 첫째와 둘째 질문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할 때 사용한 단어는 아가페였다. 그때 베드로는 아가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자신이 없어 두 번 모두 “제가 필레오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대답했다. 결국 예수님은 셋째로 “네가 나를 필레오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아가페로 도달하도록 다그치지 않고 필레오의 사랑으로 사랑의 기준과 눈높이를 낮춰주신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

하나님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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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문제는 사랑 문제다 >  성경은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자기와 돈과 쾌락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딤후 3:1-4).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말은 오히려 많아졌다. 문제는 사랑의 변질이다. 점점 커지는 인간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참된 사랑의 회복밖에는 길이 없다. 한 포기의 화초도 사랑을 주지 않으면 죽는다.  누군가 나무 12그루를 심고 각 나무에 예수님의 12제자의 이름을 써 붙이자 가룟 유다라고 이름을 붙인 나무만 점차 죽어갔다. 쳐다보기만 해도 미운 생각이 드는데 잘 자라겠는가? 한낱 미물도 사랑 없이는 못 자라는데 하물며 사람이 사랑 없이 어떻게 영혼과 정신의 키가 커지겠는가?  구 소련 때 흉년이 거듭되자 당국은 1%의 사람을 특별히 선별해 나쁜 박토를 주고 자유롭게 농사지어 먹게 했다. 몇 년 후 그 1%의 농민에게서 생산된 농업 생산량이 전 소련 농업 생산량의 27%가 되었다. 그 사례를 통해 소련 고위 당국자는 공산주의 노선을 수정하는 수정주의를 요청했다. 농사도 사랑으로 해야 한다. 모든 일의 성공에는 사랑이 필요하다. 진정 성공을 원하면 먼저 내 사랑이 건강한 사랑인지 점검해보라.  어떤 아내는 “내가 20년간 식모살이했다.”고 남편을 원망한다. 사랑이 없으면 가정과 인간관계가 비참해진다. 삶에 두려움과 절망과 허무가 있는 이유는 사랑을 잃었다는 표시다. 세상이 나빠서가 아니다. 어차피 세상은 험하다. 문제는 내게 있고 내 사랑에 문제가 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진짜 문제는 내게 사랑이 없는 문제임을 알라. 앞으로 큰일을 하고 싶으면 무엇보다 사랑하는 일을 잘 하라. 사랑이 없으면 참된 의미의 큰일을 할 수 없다. < 하나님을 사랑하라 >  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반복해 질문했는가? 베드로가 가야바 뜰의 숯불 앞에서 새벽에 세 번 주님을 부인했기에 디베랴 바닷가의 숯불 앞에서 새벽에 세 번 주님에 대한 사랑의 고백을 받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더욱 중요한

죽는 것이 진짜 사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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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손은 축복의 전령이다 >  베드로가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의 주도권까지 주님께 넘긴 모습에서 겸손함을 배운다. 한때 베드로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 그러나 그는 철저히 무너졌다. 자신을 믿고 자신만만하면 반드시 넘어진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어느 날 신상을 실은 나귀가 동네를 지나가자 사람들이 다 공손히 절했다. 그때 나귀가 “내가 이렇게 위대한 줄 몰랐다. 앞으로 나는 짐을 안 지겠다.”라고 생각하고 짐을 벗으려 앙탈했다. 바로 그때 주인의 매가 볼기짝을 사정없이 쳤다. 나귀는 자존심이 상해서 “이 사람이 나를 물로 봐!”라고 뻗대고 가지 않다가 더욱 죽도록 얻어맞았다.  하나님은 겸손하면 울타리가 되어주시지만 교만하면 더 이상 울타리가 되어주시지 않는다. 은혜와 교만은 상극이다. 은혜를 원하면 자신을 낮추라. 실력을 갖추려고 힘쓰되 진짜 실력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 능력 있는 성도가 되려고 하되 진짜 능력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 사람의 실력과 능력은 무덤 위에서 잠깐 춤추는 인생의 칼춤도구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능력 있는 사람보다 순종하는 사람을 더 원하신다. 교만이 패망의 선봉이란 말씀은 겸손이 축복의 선봉이란 말씀이다. 겸손은 축복의 전령이다. 기도할 때 기도의 주도권도 주님께 넘겨드리라. 간절히 기도한 후 이렇게 기도를 마치라. “하나님! 이 문제가 풀리길 원합니다. 내 자녀가 이렇게 되길 원하고 이 사업체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도구가 되길 원합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기도의 결과에 대한 주도권까지 다 하나님께 넘겨드리면 기도 후에 놀라운 평강과 감사가 찾아온다. 반면에 기도 후에도 여전히 불안과 집착이 있으면 그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기도한 것이 아니다. 기도 후에 평강과 감사가 있어야 아버지의 뜻대로 기도한 것이고 그때 하나님이 최상의 길을 허락하신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

과감히 사랑을 고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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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 없는 사명은 야욕이다 >  사람에게 비전이 중요하다. 비전이 있어야 발전도 있다. 그러나 비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랑이다. ‘주님을 위한 비전’보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더 중요하다. 마르다는 주님을 위해 일했고 마리아는 주님께 마음을 드렸다. 마르다도 소중하지만 예수님은 마리아가 더 좋은 편을 택했다고 했다(눅 10:42).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을 보면, 주인공 테비에(Tevye)가 아내에게 묻는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오?”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아내는 계속 25년간 자기가 힘겹게 산 얘기를 했다. 테비에가 또 물었다. “그것은 알고 있소. 그러나 나를 사랑하오?” 힘든 삶보다 사랑이 식은 것이 문제라는 암시다. 사랑이 있다면 수고도 헌신이 되고 고통도 기쁨이 된다. 사랑 하나만 있으면 불행을 얼마든지 행복으로 소화해낸다. 가장 큰 문제는 사랑이 식어진 것이고 가장 큰 과제는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다. ‘주님을 위한 일’도 소중하지만 ‘주님을 위한 사랑’이 더 소중하다.  사랑이 없는 사명은 야욕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명을 회복시키기 전에 먼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셨다. 그 질문은 결국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이다. 자기가 사랑하지 않으면서 “너 나를 사랑해?”라고 묻지 않는다. 가끔 자녀들에게 “얘들아! 너희들은 엄마 아빠 사랑해?”라고 묻는 것은 “내가 너희들을 정말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처럼 사랑을 나누는 삶은 큰 힘과 용기와 희망을 준다. 사랑은 기적의 출발점이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예수님이 무리를 사랑했기에 일어났다. 사랑 받는다는 생각 하나로 병을 극복한 사람도 많다. 사랑 받는다는 말 한 마디로 시련을 극복하고 웃음을 되찾는 경우도 많다. 사랑을 주고받는 삶은 엄청난 일들을 만든다. 기도할 때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 저도 사랑해요!”라는 이 한 마디만 해도 온 몸에 생명력이 넘치고 모든 문제가 다 사라지는 것 같다.

말씀을 지켜 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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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를 훈련해서 체질화하라 >  어떤 자녀는 부모와 같이 앉은 식탁에서 가급적이면 부모보다 먼저 음식을 먹지 않는다. 부모를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니까 부모도 대견해하며 말한다. “얘야, 너무 그럴 필요 없어.” 말은 그렇게 해도 마음은 흐뭇하다. 부모가 그렇게 편하게 행동하도록 배려해주니까 자녀는 더 감사하며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변함없이 부모보다 먼저 음식을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얼마나 복된 모습인가?  어느 날 A 집사가 부모 앞에서 먼저 음식을 먹지 않는 그 자녀의 행동을 보았다. 그 행동이 자발적인 행동임을 느끼고 칭찬하며 격려했다. “얘야, 참 예의가 바르구나. 네 모습을 보니까 참 좋구나. 앞날에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거야.” A 집사로 인해 그 가정에 감동, 배려, 감사, 평화, 평안이 더욱 넘치게 되었다. 좋은 집사다.  반면에 B 집사는 팩트를 잘 모른 채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자녀가 그러는 줄로 오해하고 이렇게 말했다. “얘야, 너무 그럴 필요 없어. 부모도 똑같은 사람이야.” 겉으로 보면 그 자녀를 생각해주는 말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 상황에서 부모가 “얘야, 너무 그럴 필요 없어.”라고 한 말에는 신뢰와 평화의 코드가 숨어있지만 B가 “얘야, 너무 그럴 필요 없어.”라고 한 말에는 불신과 불화의 코드가 숨어있다.  남의 잘못에 대해 말하거나 비판할 때 시기나 질투로 그런 말이 나오지 않게 하고 팩트를 잘 모른 채 그런 말이 나오지도 않게 하라. 특히 자기 의에 대한 과시로 그런 말이 나오지 않게 주의하라. 자기 의의 표출이나 자기 존재 의미의 확인을 위한 비판은 남도 힘들게 하고 공동체도 힘들게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한다.  어느 날 한 교인이 생일에 목사와 교인을 초청해 음식을 주는데 교인들부터 주고 목사에게는 제일 나중에 주었다. 몇 교인들이 “목사님께 먼저 드려야지요.”라고 하자 그가 말했다. “다 똑같은 사람이에요. 목회자는 구약시대 제사장이 아닌 섬기는

행복을 위해 지켜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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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음  왜 음행과 술이 위험한가? 마음을 빼앗기 때문이다(11절). 사실 마음의 평안처럼 큰 축복은 없다. 아무리 잘 살아도 평안이 없으면 소용없다. 미국에 가면 돈 많은 전문인들도 마약을 많이 한다. 왜 그런가? 인위적으로 평안을 얻기 위해서다. 극심한 인기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연예인들도 평안을 얻으려고 마약을 하는 경우가 많다.  요새 명상이 유행하는 것도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다. 그러나 명상은 잠깐의 얕은 평안은 줄 수 있어도 지속적인 깊은 평안은 주지 못한다. 마음의 평안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감사가 넘쳐야 주어진다. 또한 사도 바울처럼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알면서 자족할 때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어떤 일을 당해도 평안을 잃지 말라.  다니엘처럼 사자 우리에 갇혔을 때 사자가 달려들어도 끄덕도 안하고 편안히 있으면 사자가 겁나서 생각할 것이다. “어떻게 저렇게 평안할까? 무서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 앞에서는 무서운 사탄도 기가 꺾인다. 그때 대 평안이 찾아온다. 살다 보면 문제가 시시때때로 닥쳐온다. 그때 평안을 잃지 말고 이렇게 생각하라. “이제 곧 축복이 오겠구나.” 큰 환난이 닥치면 이렇게 생각하라. “이제 곧 큰 응답이 오겠구나.” 너무 억울하면 이렇게 생각하라. “이제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주시겠구나.” 그런 역설적인 삶의 자세를 가지라. 2. 생각  호세아 당시에 신령한 나무를 지정해놓고 거기서 점을 치거나 나무로 만든 우상이나 점술도구로 미래를 예언하는 점술행위가 성행했다. 하나님은 그런 점술행위를 하나님을 버리는 음행으로 여겼다(12절). 요새도 예언을 빙자한 점술행위와 신비하게 보이는 우상숭배 행위에 끌리는 교인이 많다. 그런 점술과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은 사탄에게 절하는 영적인 음행이다.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잘 생각해서 그런 우상숭배 행위를 분별해내고 율법주의와 기복주의와 미신과 헛된 종말예언으로부터 자신의 영혼을 지켜내라.  신앙은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지만 이성을

말씀 지식을 갖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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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    한 집사가 처음 들어보는 신기한 얘기를 많이 하는 영성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 세미나를 1년간 다니자 자기만 영성이 높은 것 같고 다른 신앙인들은 영성이 없는 것 같았다. 목사들도 대부분 영성이 없어보였다. 결국 기존 교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방황하는 영적인 보헤미안이 되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모르면서 소신 있는 사람이다. 그보다 더 무서운 사람은 모르면서 자기 영성이 최고인 줄 아는 사람이다. 책 한 권만 읽은 사람도 무서운 사람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도 66권으로 구성되게 하셨다. 항상 진리에 대해 더 많이 알기를 힘쓰라. 바른 것에 귀를 기울일 줄 알고 책도 한 권만 읽지 말고 좋은 경건서적을 폭넓게 읽고 폭넓게 바로 알기를 힘쓰라.  많이 아는 것보다 바로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단 문제는 바로 알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다. “아멘!”을 잘하는 신앙은 훌륭하지만 무턱대고 “아멘!” 하는 것은 위험성도 크다. 어떤 부흥집회에서는 “아멘!” 훈련을 잘 시켜서 강사가 마이크를 입에 대고 “쉬익!” 소리를 내도 청중들이 “아멘!” 하고 심지어는 강사가 재채기를 해도 청중들이 “아멘!" 한다. 그런 모습은 무지한 모습으로 비치기 쉽다. 무지함은 진리의 가장 큰 대적이다.  이스라엘의 영적인 음행의 가장 큰 원인은 무지함이었다(1절). 영적인 지식의 부재가 도덕적인 타락을 낳고 도덕적인 타락은 땅과 피조물의 멸절을 초래한다(2-3절). 그런 파멸에 대해 사람과 다투거나 사람을 책망함으로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지 말라(4절). 책임전가나 비난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멸망을 재촉할 뿐이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 망하는 제일 큰 원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5-6절). < 말씀 지식을 갖추라 >  사람은 돈과 기회와 빽이 없어서 망하기보다 진리를 모르기에 망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삶은 배움을 게을리 하고 거부하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