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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중에 포기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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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13장 13-14절 13.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4.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 회개하면 늘 희망이 있다 >  본문에는 바나바와 바울의 수종자로 이방인 선교에 함께 나섰다가 밤빌리아 버가에서 선교 팀을 이탈한 요한 마가의 기록이 간단히 나온다. 왜 마가가 돌아갔는가? 첫째, 선교 팀의 리더십 변화에 마음이 상해 돌아갔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본문 13절에 나오는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란 표현은 바울이 바나바보다 상위 리더십을 확보했음을 암시한다. 마가는 선교 팀에서 자기 삼촌인 바나바가 바울보다 상위 리더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관록과 나이와 경륜으로 보면 선교 팀에서 바나바가 선임 리더가 되어야 했는데 바보에서 바울이 마술사 엘루마에게 저주를 내려 맹인으로 만들고 구부로 총독을 회심시키면서부터 둘 사이의 리더십이 바울 쪽으로 기울었고 점차 바울의 리더십이 앞서는 상황이 되었다. 바나바는 그 상황에서도 넉넉한 웃음을 짓는 호인이었지만 오히려 마가는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속이 상해서 선교 팀을 이탈했다는 견해다.  둘째, 선교여행의 힘든 과정에서 부잣집 출신인 마가가 어려운 여정을 견디지 못해 돌아갔다는 견해도 있다. 마가는 예루살렘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마가 어머니는 부유한 여성으로 바나바와 남매지간이었고 바나바처럼 초대교회의 중요한 인물 중 하나였다. 초대교회가 막 생겨날 때 마가는 어린 상황에서 그 과정을 보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믿음이 형성되었지만 스스로 깨닫고 체험한 굳건한 믿음을 가진 상태는 아니었기에 고난 상황을 이기지 못하고 선교 팀을 이탈했다는 견해다.  그처럼 부족한 모습을 보였지만 나중에 바울은 마가를 자기 사역에 유용한 존재라고 했고(딤후 4:11), 마가복음을 기록하는 대 역사를 이뤄냈다. 그런 모습

참된 성령충만에 이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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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13장 6-10절 6.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7.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8.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9.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 말씀 중심적으로 살라 >  바나바와 바울이 구브로 섬의 동쪽 도시인 살라미에서 전도를 마치고 섬 중앙을 통과해 서쪽의 바보란 지역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바예수란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가 구브로 총독인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었다(7절). 서기오 바울은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지혜가 있어서 바나바와 바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했다(7절). 그러자 마술사 엘루마가 바나바와 바울을 대적해서 총독이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했다(8절). 엘루마는 ‘점쟁이’란 뜻을 가진 아람어에서 유래된 단어다.  서기오 바울이 점과 주술로 무장한 마술사 엘루마의 미혹에 잘 넘어가지 않은 것은 그가 정치인이자 통치자로서 마술사 엘루마를 함께 있게 한 것이지 신봉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에는 마음을 열었다. 결국 거짓 선지자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최선의 길은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말씀에 굳건히 서는 것이다. 말씀 중심적으로 살면서 너무 서두르지 말라. 말씀은 생명의 씨와 같다. 마음 밭에 뿌려져 열매를 맺기까지는 많은 땀과 오랜 과정이 필요하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과정을 생략하려고 하지 말라. 사람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은 다르다. 사람에게는 긴 시간이 하나님께는 짧은 시간이다. 나의 시간 리듬이 아닌 하나님의 시간 리듬에 맞춰 살라. 환경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민심이 흉흉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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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13장 2-3절 2.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3. 순종하는 교회  왜 당시 안디옥 교인들이 금식하며 기도했는가? 아마 이런 기도를 했을지 모른다. “하나님! 교회가 자꾸 부흥됩니다. 이제 본당과 교육관도 필요하고 여러 가지 필요한 것도 많습니다. 채워주소서.” 그러나 성령님은 예배당을 크게 지으라는 응답을 주시지 않고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선교사로 파송하라.”고 지시하셨다. 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가장 이루기를 원하는 것이 ‘선교’임을 깨닫는다.  선교는 예수님의 최후의 지상명령이었다. 교회가 세워진 목적은 선교 때문이고 성도가 구원받은 목적도 선교 때문이다. 그처럼 선교가 중요해도 교회의 핵심 기둥인 바나바와 바울이 떠나면 교회가 크게 흔들릴 수 있었다. 그래도 안디옥 교회는 한 마디도 불평하지 않고 다시 금식하고 기도한 후 성령님의 뜻에 순종했다. 바나바와 바울도 안정된 교회 목사 자리를 버리고 십자가를 각오하고 성령님의 뜻에 순종했기에 위대한 인물들이 될 수 있었다.  순종은 생명체를 살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핵심 원리다. 몸이 어떤 부분이 따로 놀면 그 몸은 병들거나 죽는다. 심장은 평생 자기 책무를 따라 움직여야 한다. 특히 손이나 발처럼 좌우 세트로 있는 몸 기관은 더 순종하는 모습을 갖춰야 한다. 물론 순종하거나 동행하는 삶이 꼭 밀착된 삶은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꼭 밀착된 채로 살려고만 하지 말라. 때로는 적절하게 떨어져 있으면서 협력하는 것이 진짜 순종이다.  기도할 때는 두 손을 밀착시켜도 기도 후에는 두 손을 떼고 일하라. 두 손을 꼭 붙잡고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컴퓨터 자판도 못 친다. 기도할 때 외에는 적절하게 떨어져서 서로 협력하는 것이 진짜 순종이다. 주일에는 모여 영과 진리와 거룩한 교제로 예배하고 주일 외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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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13장 1절 1.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1. 칭송받는 교회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핍박으로 흩어진 성도들이 로마의 제3도시인 안디옥에 세운 교회다. 사도행전 11장 26절을 보면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이 붙었는데 그 말은 사람들이 그들의 믿음을 인정했다는 말이다. 그처럼 인정받는 그리스도인이 되라. 안디옥 교인은 교인다운 교인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아니! 저런 사람이 교회에 다녀?”라는 말을 듣는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라.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복수할 날을 기다리며 칼을 간다. 성도는 칼을 갈지도 말고 더 나아가 아예 칼을 품지도 말아야 한다. 사랑과 자비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마음의 칼을 녹여내라. 칼을 품고 칼을 갈면 그 과정에서 자기가 먼저 칼에 베인다. 상처를 많이 주면서 얻는 승리는 좋은 승리가 아니다. 노이즈 마케팅 전략으로 생명과 세상을 병들게 하고 얻는 승리도 좋은 승리가 아니다. 살려주고 세워주고 이어주는 언행으로 생명과 세상을 치유하며 얻는 승리가 참된 승리다.  사람들의 울음소리는 성도다운 성도를 찾는 소리다. 어떤 사람도 나와 완전히 무관한 사람으로 여기지 말고 우는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라. 세상을 병들게 하는 비난받는 교인이 아니라 세상을 치유하는 칭송받는 성도가 되라. 고난 중에 있을 때 가장 힘든 것은 자기와 함께 해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과 함께 함으로 그가 혼자 아님을 일깨우는 거룩한 사명을 가지라. 사람다운 사람을 만나면 시린 영혼이 따뜻해지고 더 나아가 성도다운 성도를 만나면 주린 영혼이 풍성해진다.  믿는 사람은 믿음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특히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기 전에 먼저 사람으로 인정받으라. 왜 이단이 생기는가? 사람이 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줄 알기 때문이다

복이 있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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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누가복음 7장 18-23절 18.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니 19.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20.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21.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2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23.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 넉넉한 마음으로 기다리라 >  사회생활에서 사소한 문제로 시비를 거는 것은 자기를 감추고 절제하는 훈련의 부족 탓도 있지만 때와 상황 변화를 기다리는 믿음의 부족 탓도 있다. 어떤 사람은 ‘복’과 ‘축복’이란 단어를 정확하게 쓰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언어 표현 하나를 두고 그렇게 비판하면 시비 걸 일이 많다. 자기 존재 의미를 누구나 인정하는 실력을 통해 나타내지 않고 사소한 말 표현 하나 차이로 시비 걸듯이 나타내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다.  찬송가 94장에 이런 가사가 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그 가사를 가지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시비를 건다. “예수님이 물건이냐? ‘것’이라고 표현하게. ‘주 예수보다 더 귀한 분은 없네.’라고 써야 한다.” 그렇게 일일이 따지면 언어의 다양성은 말살되고 언어 표현을 빚어내는 작가나 시인은 늘 시비 대상이 된다. 언어 표현의 다양성과 변화를 인정하는 시인 의식을 가지라. 더 나아가 어떤 분야에서든지 적절한 변화를 수용하고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을 가지라. 은혜의 때가 되면 좋지 않았던 상황도 얼마든지 좋게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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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아모스 7장 10-15절 10.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11.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 12.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13.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 14.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15.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 기득권을 내세우지 말라 >  아모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자 당시 벧엘의 어용 제사장이던 아마샤가 여로보암 왕에게 아모스를 모반죄로 고소했다(10절). 아모스의 이스라엘 멸망 예언이 역모는 아니었지만 그 예언으로 민심이 흉흉해지고 우상숭배를 조장한 자기 제사장직도 위태해질 것을 염려해 아모스를 고소한 것이다. 즉 아모스가 여로보암 가문과 이스라엘을 향해 선포한 하나님의 심판을 과장해서 역모를 꾸민 것처럼 말했다(11절).  아마샤는 고소 후 여로보암이 크게 분노하자 아모스에게 지시했다.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12-13절).” 원어로 선견자 ‘호제’는 선지자 ‘나비’의 구식 명칭이다. 그런 구식의 비아냥거리는 호칭을 쓰며 비아냥거리는 말을 했다. 즉 남 유다 출신인 아모스에게 네 출신지인 유다로 가서 거기서나 떡을 먹고 예언하라면서 아모스를 삯꾼 선지자처럼 모욕적으로 비아냥거렸다.  아마샤는 아모스가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서 벧엘이 왕의 성소이고 왕의 궁이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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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아모스 7장 1-6절 1.주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왕이 풀을 벤 후 풀이 다시 움돋기 시작할 때에 주께서 메뚜기를 지으시매 2.메뚜기가 땅의 풀을 다 먹은지라 내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3.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셨으므로 이것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4.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주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불로 징벌하게 하시니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 하는지라 5.이에 내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그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6.주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것도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사람을 의존하지 말라 >  아모스가 본 첫째 메뚜기 환상에서 왕이 풀을 벤 후 풀이 다시 움돋기 시작한다는 표현은 당시 왕에게 우선적인 추수 수확권이 있었다는 암시다. 왕이 풀을 벤 후 풀이 다시 움돋기 시작할 때  메뚜기가 땅의 풀을 다 먹는 재앙이 내려졌다(1-2절). 그때 아모스가 하나님께 용서의 탄원을 드렸다. “하나님! 용서하소서. 야곱이 미약한데 어떻게 섭니까?” 아모스가 회개 기도를 드리자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켜 메뚜기 재앙이 이뤄지지 않게 하겠다고 말씀했다(3절). 하나님은 그의 간절한 중보기도에 즉시 응답하셨다.  아모스가 본 둘째 환상은 불 환상이었다. 그 환상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징벌시키는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고 했다(4절). 큰 바다를 삼킬 무서운 불 재앙의 환상을 보고 아모스가 그 재앙을 그쳐달라고 하자 역시 하나님이 뜻을 돌이켜 그 재앙도 이루지 않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원래 계획을 누군가의 회개와 기도로 인해 바꾸시기도 한다. 하나님은 변함없는 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이 변하지 않기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변하지 않기에 하나님의 계획은 변할 수

좋은 리더가 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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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아모스 6장 1-6절 1.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이여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르는도다 2.너희는 갈레로 건너가 보고 거기에서 큰 하맛으로 가고 또 블레셋 사람의 가드로 내려가라 너희가 이 나라들보다 나으냐 그 영토가 너희 영토보다 넓으냐 3.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 하여 포악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하고 4.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5.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6.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1. 잘못된 길로 가지 말라  선지자의 핵심 사명은 하나님의 뜻에 반응하는 인물을 키우는 일이다. 인물은 높은 위치에 있어도 교만해지지 않는다. 사랑과 공의의 양대 산맥을 끼고 굳건하게 권리와 진리를 찾아주는 길로 나아간다. 강자의 틈에 낀 나라와 영혼이 골짜기의 어둠에 시달리다가 생기를 잃는 상황에서 말씀의 빛으로 생기를 불어넣고 사람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는 인물이 참된 선지자다. 아모스는 그런 선지자였다. 그는 백성을 바른 길로 이끌려고 리더를 향해 질책하는 말씀을 전했다(1절).  얕은 수심을 벗어나게 하는 삿대 같은 존재인 리더가 제 역할을 못하면 팔로워는 수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배가 전진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바람이 불면 깃대에 달린 깃발은 펄럭여도 그 깃발이 배를 전진시키지는 못한다. 돛대에 달린 돛이 배를 전진시킨다. 사람의 시선을 끄는 ‘깃대 인생’보다는 실제로 배를 전진시키는 ‘돛대 인생’으로 살라. 바람이 불지 않거나 역풍이 불면 그때는 손에 노를 잡고 열심히 노를 저으라.  수심이 얕아 배가 전진하지 못하면 손에 삿대를 잡고 열심히 저으라. 배가 스스로 움직이는 단계까지는 삿대를 의지해야 한다. 성령의 바람은 하나님이 불게 하시지만 동시에 삿대 역할의 리더도

열심보다 바름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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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12장 9-15절 9.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10.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11.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12.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13.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14.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15.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 난관을 하나씩 통과하라 >  인간적인 위기는 신적인 기회다. 참된 기적은 하나님께 나의 인생과 앞날을 온전히 맡길 때 하나님의 신적인 계획을 따라 일어난다. 베드로는 다음날에 있을 죽음을 앞두고 기도한 후 불편한 상황에서도 감옥에서 잠들었다. 그 상황에서 베드로는 극적인 탈출의 기적이 있기를 은근히 기대하지도 않았고 그냥 평화롭게 자고 있었다.  그때 옥중에 광채가 빛나는 가운데 나타난 주의 사자가 잠자던 베드로의 옆구리를 치고 급히 일어나라고 했다. 동시에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졌다. 천사가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고 해서 그대로 했고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고 해서 따라갔다. 베드로는 천사가 그렇게 한 줄 모르고 그저 환상을 보는 줄로 여겼다. 첫째 파수를 지나고 둘째 파수를 지나자 마지막 시내로 통한 쇠문까지 저절로 열렸다.  왜 하나님은 베드로를 천사의 품에 안아 단번에 탈출시키지 않고 난관을 하나씩 통과하게 하셨는가? 기적을 추구할 때도 땀과 노력과 과정을 중시하라는 암시다. 영혼 구원도 마찬가지다. 하

살아있는 자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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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누가복음 20장 34-40절 34.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36.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37.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39.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40.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 진영 논리를 잘 극복하라 >  요즘 북한은 거의 저주받은 땅처럼 어렵게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북한 정권의 거친 말도 큰 원인이다. 북한의 성명서를 보면 “모략극을 날조한다. 역적패당이 살려면 당장 날조극을 반성하라. 아무개 역도가 부끄러운 행각을 벌이고 주제넘은 악담질을 한다.”라는 등의 표현이 많다. 국가 성명서가 거의 막말 수준이다. 저주가 담긴 거친 말은 자신의 축복부터 말살할 때가 많다.  왜 그런 저주스러운 말을 퍼붓는가? 인종이 다른가? 남북한의 인종 차이는 거의 없다. 실제로 지구상의 모든 사람의 DNA는 99%가 같다. DNA 1%의 차이가 70억 인류를 다르게 만든다면 99%가 같은 사람끼리 차별하는 것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왜 차별에서 더 나아가 저주까지 하는가? 사람이 서로를 가장 저주하게 만드는 것은 정치적 편견이나 사상적 편견으로 인한 진영 논리다.  사람마다 생각과 속성과 은사에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라. 교회에서 교우들이 생각이 달라 양 진영이 팽팽하게 대립하면 서로 다른 방법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되

참된 능력의 2대 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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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12장 1-6절 1.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2.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3.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4.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5.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6.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1. 간절한 믿음의 기도  베드로가 옥에 갇히자 교회가 그를 위해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다. 교회는 12사도 중 핵심 사도였던 야고보가 순교한 상황에서 베드로까지 순교할까봐 간절히 기도했다. 그 기도가 베드로의 극적인 구원을 이끌어냈다. 기도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예수님은 유언 설교인 다락방 강화에서 기도의 축복과 특권을 강조하셨다. 그 특권을 활용하라.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을 줄 알면 어떤 사람 앞에서도 당당히 설 수 있고 어떤 환경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  여우와 고슴도치 우화에서 그들이 싸우면 매번 많은 것을 아는 여우가 한 가지만 아는 고슴도치에게 졌다. 고슴도치는 여우를 만나면 잔머리를 쓰지 않고 몸을 웅크려 원으로 만드는 것 한 가지만 한다. 그러면 여우가 고슴도치를 건드렸다가 침에 찔려서 진다. 위기를 만났을 때 몸을 웅크려 기도하면 위기는 기회가 된다. 문제가 생기면 먼저 기도하라. 사람은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걱정하지만 진짜 큰 문제는 기도하지 않는 것이고 핵심 문제 해결 방법은 기도하는 것이다.  물론 간절히 기도해도 나의 기대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수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노(No)!”도 하나님의 멋진 기도 응답 방법이다. 그러므로 기도한 후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조치를 신뢰하라. 당시 성도들은 야고보를 위해서도 기도했지만 야고보는 순교했고 베드로는 기적적으로 구출

몸으로 사랑을 표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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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11장 27-30절 27.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 몸으로 사랑을 표현하라 >    어느 날 몇몇 선지자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로 찾아왔다. 당시 교회 선지자는 구약시대 선지자와는 달리 사도 다음의 직분자로서 성경을 복음에 의거해 가르치고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 교사 같은 존재였다. 그 중에 아가보란 사람이 일어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고 성령님의 음성을 전했는데 로마 글라우디오 황제 때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글라우디오 황제는 재위 초기에는 유대인에게 우호적이었다가 황제숭배를 강요하며 말년에는 유대 종교 집회를 금지하고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했다.  당시 흉년은 유대 지역에 특히 심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상당한 구제헌금을 모아 바나바와 바울의 손으로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에게 보냈다. 그때의 구제에 안디옥 교회 외에 갈라디아 교회(갈 2:10), 고린도 교회(고전 16:1),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롬 15:26)도 동참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의 헌금을 받고 굶주렸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이방인에게 복음의 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했을 것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방인 성도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기류가 거의 사라졌다. 결국 안디옥 교회의 사랑의 부조는 생각으로만 하나 되었던 예루살렘 유대인 성도와 각지의 이방인 성도가 실제로 하나 되게 한 역사의 시발점이었다.  하나 되려면 격려해 주고 기도해 주면서 사랑을 표출하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실제로 내 것을 힘써 나누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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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11장 24-26절 24.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 좋은 리더가 되라 >  안디옥은 수리아 셀류시드 왕조의 수도였다. 당시 안디옥은 로마 제국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셋째로 큰 도시로서 약 50만 명이 살고 있었다. 또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도 전체 인구의 7분의 1이 될 정도로 많이 살고 있었다. 스데반의 핍박으로 예루살렘에서 흩어진 사람들이 안디옥에 이르러 처음에는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다(19절). 그 흩어진 사람 중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 몇 사람이 안디옥에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그 복음을 듣고 수많은 헬라인들이 주님께 돌아왔다(21절).  안디옥 교회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어울려 잘 성장한다는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에 들렸다(22절).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도들 대신 바나바를 파송했다. 바나바는 유대 본토 출신이 아닌 안디옥과 가까운 구브로 섬 출신으로 언어와 문화에서 사도들보다 안디옥 성도에게 더 친화적으로 목회할 수 있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이르러 보니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안디옥 신자들에게 있었다. 바나바는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위로했고 착한 성품에 성령과 믿음까지 충만했던 바나바의 신실한 목회로 많은 사람들이 더해졌다.  교인들이 많아지면서 바나바는 혼자 사역하기에 벅찬 것을 알고 다소에 10여 년간 은거해 있던 바울을 찾아 그를 안디옥으로 데려왔다(25-26절). 위대한 모습이다. 부목사가 너무 탁월하면 담임목사는 자신의 리더십이 훼손될까 하는 염려도 한다. 그래서 탁월한 사람을 부목사나 동역자로 삼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길 수 있지만 바나바는 거룩한 비전과 목적을 따라서 그런 부담을 기꺼이 졌다.

사모하며 기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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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10장 24-26절 24.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25.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26.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 사모하며 기다리라 >  로마 군대 백부장 고넬료는 베드로를 초청하고 맞이할 때 가족과 친지들을 다 모았다(24절). 고넬료가 가족은 물론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까지 모아 베드로를 기다린 것은 그만큼 사모하며 기다렸다는 뜻이다. 그렇게 기다리던 베드로가 들어오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했다(25절). 그렇게 겸손하게 자기를 낮춰 맞이하는 모습도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렸음을 나타낸다. 은혜는 사모하며 기다릴 때 넘치게 주어진다. 기다리지 않아도 올 사람은 오지만 그냥 만나는 것과 사모하며 기다렸다가 만나는 것은 기쁨의 강도가 다르다.  가끔 예상치 않게 은혜를 받기도 하지만 간절히 사모하고 기다린 후에 받는 은혜는 훨씬 크게 느껴진다. 성도의 최고 소원은 예수님을 기다리고 만나는 것이다. 그 은혜를 사모하며 기다릴 때 다른 은혜도 넘친다. 예배할 때는 예배 시간 전에 먼저 와서 기도하며 예배의 시작을 기다리라. 예배 5분 전에 오는 것과 예배 5분 후에 오는 것은 차이가 크다. 시간으로는 10분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깊이와 넓이에는 큰 차이가 난다.  사모하며 기다릴 때는 준비하며 기다리라. 많은 성도가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린다. 특히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역사의 봄이 속히 오기를 기다린다. 왜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지는가? 가장 큰 이유는 조금 더 잘 준비하라는 뜻이다. 마음의 묵은 때를 힘써 닦아내라. 물론 그 닦아내는 일도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한다. 깨끗한 마음으로 재림을 사모하며 기다리면 하나님은 이미 그 마음에 와 주신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한 것은 베드로를 마치 신적인 존재나 황

변화를 수용하고 극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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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11장 1-4절 1.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3.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4.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 열린 마음을 가지라 >  1970-80년대에 우리나라에서는 건물도 없이 천막만 치고 목회해도 부흥하는 교회가 많았다. 그때 교회가 우후죽순으로 생겼고 신학교도 학생들로 넘쳤다. 동시에 목사 안수를 남발하는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속성으로 받는 가짜 목사도 늘어났다. 가짜 목사가 말발이나 웅변 실력을 앞세워 사람들을 웃겼다 울렸다 하고 거짓 능력을 앞세워 교회를 키워도 당시에는 인터넷을 통한 정보 유통이 없고 검증 시스템도 빈약해서 가짜를 잘 걸러내지 못했다.  가짜 목사는 대개 신학과 배움을 무시하고 영성을 내세운다. 또한 영성과 윤리가 별개인 것처럼 “기독교는 윤리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윤리를 무시한다. 삶 자체가 편법과 거짓이기에 당연히 윤리를 무시할 수밖에 없다. 가짜 목사들은 신학과 배움을 무시해도 내적인 열등감 때문에 자기를 어떻게든 높게 보이려고 한다. 그래서 가짜 박사 학력까지 걸치고 기존 목사들을 공격할 거리를 찾아내어 비판하면서 자신의 영적인 지식을 은근히 과시한다. 때로는 비본질적인 문제로 그렇게 공격한다.  1980년대에 한 가짜 목사가 주장했다. “한국 목사들이 쓰는 ‘하나님이 축복한다’라는 말은 무식한 말입니다. 축복(祝福)이란 말에서 축(祝)은 ‘빌 축’자로서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복을 비신다’는 뜻인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누구에게 복을 빕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복 주신다‘고 표현해야 됩니다. 목사들이 복과 축복도 잘 구분하지 못하니 그렇게 무식하면 됩니까?”  어느 날 출판사를 운영하는 A 집사가 기도원에 갔다가 설교 중에 그 가짜 목사의 복과 축복의 차이에 대한 주장을

편견을 잘 깨뜨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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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10장 9-16절 9.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1.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15.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 편견을 잘 깨뜨리라 >  왜 편견이 심각한 죄인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상대방을 이유 없이 미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편견에 사로잡혀서 미워하는 사람은 뚜렷한 이유가 없다. 유대인들은 특별한 이유 없이 이방인들을 무조건 미워하고 경멸했다. 이방인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 부정하다고 했다. 무서운 편견이다. 본문의 베드로를 보라. 성령 충만했던 대사도 베드로에게도 그런 편견이 있었다. 그처럼 편견에 의한 잘못된 전통은 영혼을 망가뜨린다.  유대인의 율법 해석서인 미쉬나는 이방 여인의 출산을 돕지 말라고 하고 유대 여인의 출산을 이방인이 돕지 못하게 했다. 짐승에게 아기를 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크게 잘못된 가르침이다. 그런 잘못된 가르침을 정당화하니 편견이 무서운 것이다. 이방인을 인격체로 보지 않고 무조건 무시했던 교만 때문에 결국 이스라엘 자신이 하나님 앞에 버림받았다. 편견의 결말은 자신의 파멸뿐이다.  고넬료가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려고 사람들을 보낸 다음 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갔는데 그 시각은 오

가족이 인정하는 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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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10장 1-2절 1.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 배타적인 우월감을 버리라 >  믿음의 기도는 놀라운 기적의 원천이지만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수시로 일어나기를 기대하지는 말라. 성도에게 죽음은 편안한 잠이다. 그 잠에서 깨어 소란한 세상으로 돌아오는 기적이 보편화될 수는 없다. 예수님이 수시로 죽은 사람을 살려내지 않은 것을 오히려 감사하라. 중요한 것은 열심히 살다가 하나님께 가는 것이다. 물론 천국 가기 전에 꼭 사랑하는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라. 그가 지옥에 가면 영원한 이별이 된다.  한 여성은 교통사고로 먼저 간 불신자 남편과 자녀를 보고 싶다고 자신은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했다. 지옥은 무서운 곳이다. “지옥에서라도 만났으면 좋겠다.”는 감상주의는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의 고통을 지옥에서 영원히 보면서 지내야 한다면 그 고통은 지옥불보다 더 무서운 고통이다. 잘 믿고 천국에 가면 하나님은 천국에 가지 못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아쉬운 마음도 초자연적으로 위로해주실 것이다. 그런 위로에 기대지만 말고 사랑하는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도록 힘써 전도하라.  다비다를 살린 후 베드로는 얼마 동안 욥바 바닷가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렀다(행 9:43). 무두장이는 동물 가죽으로 가죽 제품을 만드는 사람이다. 사람의 시체를 만지면 일주일 동안 부정하게 여겨졌다(민 19:11). 동물의 시체를 만져도 부정하게 여겼기에 유대인들은 무두장이를 경멸했다. 또한 무두장이 일을 하려면 물이 있어야 했고 악취도 심했기에 그들은 대개 성 밖의 물가에서 거주했다.  베드로가 부정한 천민 계층으로 여겨진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기꺼이 머문 것은 유대인의 상식으로는 맞지 않는 태도였지만 베드로는 신앙적인 편견과 문화적인 고집을

분별력을 힘써 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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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9장 36-40절 36.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38.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39.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40.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 분별력을 힘써 기르라 >  욥바의 다비다는 믿음과 실천이 겸비된 다정한 성도로서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 어느 날 그녀가 병들어서 죽자 시체를 씻고 다락에 뉘였다. 시체를 씻고 다락에 뉘였다는 것은 히브리 장례 절체를 따라 시체 처리를 했다는 뜻으로서 그녀의 죽음이 잠시 가사 상태에 빠진 것이 아닌 진짜 죽음이었다는 뜻이다. 다만 시체에 향유 처리를 하지 않은 것은 그녀의 다시 살아날 것에 대한 약간의 기대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자들은 다비다의 시체 처리를 한 후 베드로가 욥바 근처의 룻다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했다. 베드로가 두 사람과 함께 욥바로 가서 다락방에 올라가자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였다(39절). 이 기록을 보면 다비다도 과부였을 가능성이 크고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과부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사랑을 베푼 ‘과부들의 대모’와 같은 존재로서 오늘날로 말하면 ‘사랑이 넘치는 여성 자선가’였을 것이다.  모든 과부들이 울면서 베드로에게 다비다가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준 옷을 보이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다비다가 얼마나 평소에 사랑이 넘치는 구제와 선행을

음지의 조력자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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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9장 31절 31.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 영향력을 키우는 요소 >  영혼에 찬란한 빛이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빛을 비추는 것도 중요하다. 가슴에 따뜻한 온기가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온기를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다. 삶에 거룩한 비전이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비전을 도전하는 것도 중요하다. 억지로 나를 알리거나 드러내려고 할 필요가 없다. 나를 상품화시키지 말라. 하나님의 때에 저절로 알려지고 드러나게 하라. 억지로 나타내면 점차 내면이 비워지면서 선한 영향력이 줄어들지만 저절로 드러나면 점차 내면이 채워지면서 선한 영향력이 늘어난다.  말이 아닌 삶으로 영향력을 키우라. 삶보다 말을 앞세우면 갈등과 불화 가능성이 커지고 말보다 삶을 앞세우면 화합과 평화 가능성이 커진다. 종종 한적한 곳에서 침묵 시간을 가지라. 삶이 뒷받침되면 침묵도 위대한 메시지로서 영향력의 통로가 된다. 능력 있는 사람이 침묵할수록 사람들은 그에 대해 더욱 널리 전파한다. 내면의 능력은 때가 되면 영향력으로 나타낸다. 그 영향력이 입에서만 나타나지 말고 삶에서도 나타나게 하라.  자랑스럽고 감격적인 체험을 해도 입을 힘써 절제하라. 그러면 지켜보는 사람도 겸손을 배운다. 선한 영향력이 무언으로 전달된 것이다. 어디에 가든지 선한 영향력이 넘치게 하라. 우울한 기운이 아닌 활기찬 기운을 전하며 식어버린 열정을 새롭게 일으키라. 성도는 거룩한 불을 일으키도록 부름 받은 존재다. 마음에 거룩하고 뜨거운 불이 있다면 이미 반전의 기적은 시작된 셈이다.  초대 교회에 대한 박해로 인해 교인들이 각처로 흩어지면서 복음이 더욱 널리 전파되었다. 결국 교회는 오순절 사건으로 ‘양적인 성장’을 이뤘고 식탁 봉사 문제로 인한 갈등을 통해 최초의 교회조직을 만드는 ‘조직적인 성장’을 이뤘고 대규모 핍박을 통해 오히려 ‘영향력의 성장’을 이뤘다

삭개오가 축복받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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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누가복음 19장 1-10절 1.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1. 예수님을 추구했기 때문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으로 가기 며칠 전에 삭개오가 살던 여리고에 잠시 들리셨다(1절). 삭개오는 부자 세리장이었지만 백성들로부터 사람취급도 받지 못했다. 동족의 혈세를 빨아 로마 정부에 바치는 앞잡이로 여겨졌으니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그는 가끔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중년에 자기 인생을 돌아보면서 가족도 모르는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인생에는 돈과 권력이 풀지 못하는 내면의 문제가 많다. 그 문제를 보는 눈이 열려 돈보다 귀한 것을 삭개오는 찾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명성을 듣고 모여들자 삭개오는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했지만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려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3-4절). 진리와 행복을 막는 2대 걸림돌은 “내가 키가 작다.”라는 내 탓 의식과 “나를 막는 사람이 많다.”라는 남 탓 의식이다. 그런 의식의 한계에 갇혀 살지 말라. 포기하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