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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의 옆에 서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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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9장 26-30절 26.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8.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 의인의 옆에 서 주라 >  다메섹을 탈출한 바울은 바로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리고 3년 만에 찾은 예루살렘에서 15일간 머물면서 베드로를 만나려고 했는데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했다(갈 1:18-19). 그때 다른 제자들과도 사귀려고 했지만 제자들이 다 두려워하며 바울의 제자 됨을 믿지 않았다(26절). 일부 사람은 바울의 고도의 교회 파괴 작전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바울을 믿어준 사람이 바나바였다.  바나바가 바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했다(27절).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제가 그의 믿음을 보증합니다. 그는 진짜 변화되었습니다.” 결국 바나바의 보증으로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교회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인물 중 하나로 자라났다. 바울이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믿어 주고 그의 가능성을 인정해주고 세워준 바나바 때문이었다.  왜 초대 교회가 무수한 핍박 속에서도 힘 있게 자랐는가? 바나바처럼 말이 아닌 삶으로 복음의 능력을 전파한 사람들 때문이었다. 어디서든지 충만의 역사가 나타나려면 하나 됨은 필수다. 바람과 분위기에 흔들리면서 마음이 나뉘면 충만의 역사가 나타나기 힘들다. 목표와 비전이

구원의 4대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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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9장 19-22절 19.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1. 마음의 변화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잠시 시력을 잃었다가 시력을 회복한 후 다메섹의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으면서 즉시 각 회당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바울의 변화로 인해 놀랐다. 점차 바울의 간증 집회가 소문이 퍼지며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했다(20-22절). 왜 박해자 바울이 즉시 전도자로 바뀌었는가? 그의 마음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사람의 속마음을 다 알 수 없지만 마음은 대개 행동과 얼굴과 말로 나타난다. 그처럼 누가 구원받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구원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거가 있는데 그 첫 번째 증거가 마음의 변화다. 거룩한 삶을 사는 문제는 그 다음 문제다. 거룩한 삶에는 부족함을 보여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주님의 비전과 기대를 생각하면서 “주님이 나를 보고 있다.”는 마음을 가진 것은 구원받은 하나의 증거가 된다. 2. 생각의 변화  믿음이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아니지만 구원의 믿음을 가지면 생각이 긍정적이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룸을 믿기 때문이다. 믿음이 용기는 아니지만 참된 구원의 믿음을 가지면 용기가 생기고 믿음이 넉넉함은 아니지만 참된 구원의 믿음을 가지면 마음이 넓어지고 넉넉해진다. 모든 상황을 하나님이 다스리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의 변화가 필요하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선택을 확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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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9장 3-5절 3.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 하나님의 선택을 확신하라 >  바울의 고향은 다소였다. 다소는 당시 큰 대학이 있던 헬라 도시였다. 유대계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의 부모는 바울이 헬라 문화에 동화되지 않도록 다소의 대학에 보내지 않고 예루살렘에 보내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되게 했다. 결국 바울은 헬라 문화와 히브리 문화가 함께 투영된 삶을 살았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은 헬라 문화에 복음을 전하려고 바울을 선택해 사용하셨다. 얼마나 적합한 선택인가?  하나님이 어떤 일을 이루실 때 그 일에 준비가 안 된 사람을 선택해 적합한 능력을 주고 쓰시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사실상 헬라 문화권에 복음을 전하는 일은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보다 바울이 훨씬 적합했다. 게다가 사울은 천부적인 자질과 학문적인 능력도 갖췄다. 결국 성령님의 선택은 가장 적합한 선택이었다. 인생은 선택이다. 특히 좋은 선택은 삶에 용기를 준다. 궁극적으로 성도의 선택은 하나님의 선택이다.  믿음을 잃지 않으면 하나님은 사람의 잘못된 선택도 활용해 선한 결말을 만들어내신다. 때로 하나님은 신실한 성도에게도 낮보다 밤을 선택하는 길을 가게 허락하신다. 그 과정을 통해 선택의 중요성도 깨닫고 좋은 선택을 하는 시야도 열리기 때문이다. 때로는 낮보다 밤에 더 많은 것이 보인다. 특히 내면을 보는 시야는 밤에 더 발달된다. 한때 잘못된 선택을 했어도 다시 하나님을 선택하고 나아가면 합력하여 선을 이뤄낼 수 있다.  내가 하나님을 선택하면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주신다. 사실상 내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이끄신 것이다. 아무도 나를 돕지 않는다고 탄식하지 말라. 하나님이 나를

광야를 이겨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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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9장 23-25절 23.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선천적 재능만큼 후천적 준비도 중요하다. 준비는 상당한 능력의 원천이다. 미래를 잘 준비하는 삶이 위대한 예언자적인 삶이다. 인생 광야도 잘 준비하면 넉넉히 이겨낼 수 있다. 수시로 찾아오는 인생 광야를 잘 이겨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인기에 얽매이지 말라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간 많은 깨달음을 얻은 후 사도 바울은 곧장 화려한 개선장군처럼 예루살렘에 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 조용히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와 복음을 전했다. 그러자 다메섹 유대인들이 바울 죽이기를 공모했다. 그 계교가 바울에게 알려졌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켰다(24절). 그때 바울의 제자들이 밤에 바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려 탈출시켰다. 그 사실을 알면 바울의 대적들이 비겁하다고 했겠지만 그래도 바울은 그런 비판에 흔들리지 않았다. 물론 사람의 칭찬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사람의 비판이나 칭찬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 그리고 칭찬이나 인기를 추구할 때는 바르게 추구하려고 하라. 요새 유튜브 1인 방송에서는 구독자를 늘리려고 무리수를 많이 쓴다. 좋은 콘텐츠로 정당하게 구독자를 늘리기보다 자극적인 말로 남의 명예와 인권을 침해하고 구독자를 늘리는 경우도 많다. 어떤 사람은 남의 사생활을 무차별적으로 폭로한다. ‘국민의 알 권리’라는 그럴듯한 포장지를 씌워 무차별로 폭로하는 사생활 침해를 잘 분별해서 걸러내지 않으면 내 영혼도 점차 오염된다.  나의 기분 전환용으로 서슴없이 남의 사생활 침해를 자행하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따른다. 특히 남의 사생활 폭로로 구독자 수를 늘리고 돈을 버는 비열한 돈벌이는 스스로의 인생을 망치는 것이다. 또한 그런 식으로 남의 행복과 성공을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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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8장 25-28절 25.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26.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27.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 성도의 삶에 우연은 없다 >  사람은 환경의 영향도 받지만 환경에 영향도 준다. 내가 있는 곳에서 작품을 만들어내라. 더 나아가 그곳 자체를 작품으로 만들라. 육적인 변화와 성공보다 영적인 변화와 성공이 중요하다. 성령충만이란 수시로 다가오는 패배의식을 믿음으로 극복하며 사는 것이다. 성령님이 함께 하면 얼마든지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 운명을 사명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나쁜 우연을 선한 필연으로 바꿔낼 수 있다.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있다. 큰 틀에서 나의 삶은 예정된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다만 가는 과정에서 나의 계획과 노력을 참고해 하나님은 수많은 변수를 허락하신다. 성도의 삶에도 운명적인 요소가 있다. 불신자의 삶은 ‘덧없는 운명(fate)’이지만 성도의 삶은 ‘정해진 운명(destiny)’이다. 누가 정했는가? 하나님이 정하셨다. 성도에게 벌어진 어떤 일이 사람의 눈에는 우연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필연적으로 있게 하셨다.  나의 현재의 삶을 전적으로 긍정하라. 고난과 문제 가운데 있어도 하나님의 선한 섭리로 그런 현실이 펼쳐졌다고 믿으라. 성도의 삶에 우연은 없다. 내가 알지 못하는 중에도 하나님의 뜻은 멋지게 실현되고 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구하려고 다양한 고려를 하고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시면서 나의 상상을 초월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때로 성도의 삶에 시련이 있어도 그 시련조차 축복으로 가는 과정임을 굳게 믿으라.  예루살렘

사람을 높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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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8장 9-10절 9.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10.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 사람을 높이지 말라 >  빌립 집사가 활동할 당시에 사마리아 성의 마술사 시몬은 놀라운 마술로 백성들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했고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일컫기도 했다(9-10절). 초대 교회 문서를 보면 순교자 저스틴은 그가 애굽에서 배운 철학과 마술로 사람을 미혹했다고 했고 이레니우스는 그를 영지주의의 창시자로 여겼고 외경 ‘베드로행전’에서는 로마 성도를 미혹한 자로 묘사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면서 마술을 곁들여 영혼을 미혹한 거짓 영성주의자였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란 별명을 붙일 정도라면 대단한 칭찬이다. 당시 일부 추종자들은 말했다. “저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 자체야.” 그런 표현은 보통 사람에게는 감히 쓸 수 없는 표현이다. 사람에 대해 그렇게 말하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조심하고 그런 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더욱 조심하라. 가짜 복음은 겉으로는 복음을 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을 복음을 이용해 결국 사람을 높인다.  이단들은 하나 같이 교주를 높인다. 때로는 교묘한 말로 하나님을 높인다면서 교주를 높인다. 그런 곳에 빠지면 정상적인 분별력을 잃고 맹목적으로 따른다. 이단 교주나 이단 추종자들은 복음과 예수님을 내세우기 때문에 분별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침착하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분별하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단들은 말로는 ‘예수’를 내세우지만 그들의 진짜 내면의 동기는 자기를 높이는 것이다. 그것이 가짜 복음의 특징이다. 결국 화려한 능력이 없어서 겸손을 잃지 않는 것이 사실상 진짜 은혜다.  목회자를 높일 때는 목회자에 대한 존경과 존중으로 끝내고 전도와 격려를 위해 “우리 교회가 좋아. 우리 목사님이 좋

성도가 해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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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8장 1-8절 1.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4.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7.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1. 복음 전파  본문 5절을 보라.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빌립 집사가 복음을 전파한 곳은 사마리아 성이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혈통적으로는 가까웠지만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매우 싫어했다.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가 당시 북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집중적인 혼혈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에게 호의를 가졌고 그들의 구원에도 관심이 깊으셨다.  사마리아인에 대한 유대인의 편협성과 배타성을 선교 열정이나 경건성만으로 깨뜨릴 수 없었기에 핍박이란 수단이 사용되었다. 결국 극심한 핍박으로 유대인들은 배타성과 편협성을 나타낼 수도 없이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감으로 피난길이 전도길이 되었다. 때로 하나님은 고난이나 전쟁 등을 선교 통로로 활용하신다.  빌립 집사는 식탁 봉사를 위해 선택되었지만 사마리아에서는 전도만 했다. 전도는 성도의 기본 책무란 암시다. 당시는 큰 핍박 시기였기에 전도에 나서기 쉽지 않았지만 빌립 집사는 목숨의 위험을 감수하고 복음 전파에 나섰다. 그처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 전파에 힘쓰라. 스스로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려면 그 진단은 간단하다. 즉 “내 능력과 지위와 물질과 시간을

천국에서 환영받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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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7장 54-60절 54.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 천국에서 환영받는 길 >  스데반이 죽을 때 무엇을 보았는가? 스데반은 순교할 때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56절). 성경은 보통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표현하고 사도신경에서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고 고백한다. 그런데 스데반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 예수님이 기쁨과 감동으로 스데반을 뜨겁게 일어서서 환영했다는 암시다. 언젠가 천국에 입성할 때 예수님의 뜨거운 환영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말씀에 반응하라  스데반이 복음을 변호하는 장문의 변증설교를 하고 마지막으로 대적들의 죄와 잘못을 엄중히 지적했을 때 대적들은 스데반의 말을 자기들에게 한 말로 듣고 마음에 찔려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았다(54절). 그처럼 말씀을 들을 때는 기본적으로 내게 한 말씀으로 받으라. 왜 예배 때 말씀을 듣는가? 마음의 찔림을 받기 위해서다. 무슨 말씀이든 “이 말씀은 내게 주신 말씀이구나.” 하고 들어야 말씀이 살아 역사한다. 설교자는 가끔 이런 말을 듣는다. “목사님! 오늘 말씀은 제게 주신 말씀이네요.” 그 말은 예배를 잘 드렸다는 암시다.  마음의 찔림을 받은 후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 대적들은 스데반으로부터 전해지는

성령님을 거스리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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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7장 51-53절 51.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 성령님을 거스르지 말라 >  아브라함 이후 이스라엘의 불순종 역사를 언급한 후 스데반은 설교의 결론에서 자신을 고소하고 심문한 사람들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들이라고 질책했다.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았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불순종하는 사람의 특징은 항상 성령님을 거스르는 것이다(51절). 신앙이란 내 노력으로 나를 발전시키는 것이나 겉모습을 교양 있게 꾸미는 것이나 성경을 달달 외우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완벽한 신앙적인 모습이 있어도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에 순종하지 않으면 참된 믿음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면 잠시 머물다가 떠나시지 않고 영원히 떠나지 않고 머물러계신다. 하나님이 성도 안에 거하시는 것보다 더 놀랍고 기적적인 일은 없다. 솔로몬은 성전을 짓고 하늘의 하늘도 하나님을 담을 수 없기에 자신이 지은 성전에도 하나님을 담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 내 안에 성령 하나님이 거하시니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가?  성령님은 내 안에 거하셔서 수시로 말씀하신다. “얘야,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지 말라.” 참된 성도는 그런 성령님의 인도에 자신을 굴복시킨다. 참지 못할 말을 듣고도 성령님이 참으라고 하면 참고 작은 잘못을 했어도 성령님이 그것을 지적하면 깊이 회개하는 성도가 참된 성도다. 또한 손해가 되어도 성령님이 시키는 일에 순종하는 성도가 참된 성도다.  형식적인 믿음은 성령의 감동을 소멸시켜서 늘 자기 생각과 처지를 앞세움으로

형식적인 신앙을 멀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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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7장 46-50절 46.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47.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49.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50.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 헤롯 인생으로 살지 말라 >  스데반은 공회원들 앞에서 변증설교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최대 성군으로 여기는 다윗에 관한 말씀을 전했다. 다윗에 관한 말씀을 전할 때는 다윗의 삶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갑자기 성전과 관련된 얘기를 했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성전을 건축하려는 마음을 가졌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신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46-47절). 그 솔로몬 성전에 대해 스데반은 큰 호감을 표현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성전에만 계시는 것은 아니기에 성전이라는 건물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암시의 말씀을 했다(48-50절).  스데반은 성전 건축 자체를 죄악시하지 않았다. 다만 눈에 보이는 성전보다 영적인 성전이 더 중요함을 역설했다. 그 말씀을 듣고 교권주의자들이 얼마나 마음이 뜨끔했겠는가? 성전 건축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크고 화려하게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나 백성들의 피눈물을 흘리게 하면서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나 교권주의자가 자기 위신과 권세를 과시하려고 성전을 건축하는 것은 잘못이다.  대개 야망이 큰 사람이 외형을 내세워 과시하려고 한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성전 건축에 목을 매는 모습은 야망이 크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표식이다. 비전과 야망은 다르다. 야망은 팔로워의 피눈물을 흘리게 하면서 성취하려는 것이고 비전은 팔로워의 피눈물을 닦아주려고 성취하려는 것이다. 외형에 매달리는

천국 미인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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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6장 7-15절 7.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8.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9.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10.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11.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12.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3.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4.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15.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 집사의 의무 >  교회 역사를 보면 문제와 시련을 통해 교회와 교인은 더 강해졌다. 과부를 위한 봉사 문제로 교회 내에 갈등이 생겼을 때는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7집사를 세움으로 교회가 더 건강해졌다. 그 후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해지고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복음의 진리에 복종했다(7절). 수많은 제사장들까지 회개한 사실은 당시에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유대 교권주의자들은 치욕으로 여겼겠지만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당시 약 8,000명의 유대인 일반 제사장들은 절기 등에 제사 의식을 돕는 때 외에는 고정 수입이 없어 생계를 위해서 많은 제사장들이 알게 모르게 일을 했다. 심지어 굶어죽는 제사장도 있을 정도로 일반 제사장 가정과 대제사장 가문의 신분 차이 및 경제력 차이는 매우 컸다. 그런 고통스런 상황에서 기독교 복음은 유대교 제사장들에게도 상당한 임

소외감을 잘 극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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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6장 1-4절 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 파 사람을 원망하니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 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 교회 집사의 요건 >  본문에는 역사상 교회 조직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 나온다. 왜 교회 조직이 생겼는가? 당시 교회가 커지면서 고아, 과부, 노인, 극빈자 등 구제 대상도 늘었다. 특히 과부를 돌보는 구제를 할 때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네 쪽 사람들이 구제 대상에 빠졌다고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면서 갈등이 생겼다(1절). 그 갈등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갈등이 아닌 아람어를 하는 본토 유대인과 헬라어를 하는 헬라화된 유대인의 갈등이었다.  당시 사도들은 구제 때문에 문제가 생기자 식탁 봉사를 전적으로 맡길 일곱 집사를 선택하고 본인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하겠다고 결정했다. 교인들은 그 결정에 기뻐하며 7명의 집사를 뽑았다. 그때 어떤 사람을 뽑았는가? 첫째, 성령충만한 사람을 뽑았다. 성령충만한 사람이 실제로 봉사도 잘하기 때문이다. 성령충만이란 세상일에 대한 관심을 모두 버리고 산에서 기도하면서 깊은 영성을 쌓는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 참된 성령충만이란 세상의 일들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잘 수행하는 것이다.  둘째,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뽑았다. 집사는 성령충만과 더불어 지혜도 있어야 한다. 자신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행한다지만 개인의 영성이 때로 공동체의 영성을 위협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혜는 도덕적인 자질 이상의 것이다. 최선의 수단으로 최선의 목적에 도달하는 거룩한 상식을 가진 것이 지혜다. 직분자들은 말씀을 따라 자기 능력을

고난 중에도 기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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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5장 40-41절 40.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 문제가 없는 곳은 없다 >  한 남편이 아내를 따라 교회에 나왔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면서 마음에 안 드는 모습이 너무 많이 보였다. 교회에 오면 자기를 잘 대우하고 사랑해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친한 사람끼리만 똘똘 뭉쳐있었다. 봉사하고 싶어도 기존 교인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주지 않았다. 교인들이라면 정직하게 살 줄 알았는데 별로 정직한 것 같지 않았고 용서와 양보가 많을 줄 알았는데 가끔 사소한 일로 다퉜다.  그 모습에 실망해서 구경꾼처럼 있다가 신도시로 이사했다. 마침 집 앞에 작은 교회가 있어 등록했는데 거기서는 등록하자마자 감투란 감투는 다 씌워줬다. 자신도 신났다. 처음에는 목사와 호흡이 척척 맞아서 목사를 도와 멋진 교회를 만들겠다고 했다. 그런데 1년도 안 되어 목사와 이견이 생겨 상처를 받았고 목사도 자기를 걸림돌로 여기는 것 같았다. 서로에 대한 기대가 컸기에 환멸도 컸다. 결국 교회를 옮겼는데 거기서도 또 상처받고 실망했다.  잠시 교회 출석을 포기하고 가정예배로 대신하기로 했지만 그 결심도 얼마 가지 못했다. 그래도 주일성수를 해야 한다는 믿음은 있어서 어딘가 좋은 교회가 있겠지 하고 매주 여기저기 교회를 순례했지만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문제가 없어 보여도 조금 깊이 들어가면 문제가 있었다. 점차 자기를 반겨주는 교인들과 목사의 환대도 순수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처럼 냉소와 비판으로 교회를 순례하면서 그 부부가 거쳐 간 교회가 25개가 넘었다.  문제가 없는 교회도 없고 고난이 없는 인생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극복이다. 왜 하나님이 신실한 성도에게 고난을 주시는가? 잘 극복해서 하나님이 쓰실만한 성도가 되라는 뜻이다. 고난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무심하다고 하지 말라.

주기를 힘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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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4장 32-35절 32.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 나눔의 축복 >  초대 교회는 거룩한 교제를 통해 자기 재물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모든 물건을 서로 나누었다(32절). 그래서 초대 교회의 모습이 공산주의가 추구하는 이상과 같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지향하는 목표는 같을지라도 목표를 이루는 수단은 180도 다르다. 사랑이 없이 권력에 의한 강제적인 분배의 강요는 약탈이다. 초대 교인들은 강요나 규율이나 계명이나 서약이 없이 감동을 따라 자발적으로 힘써 나눈 것이었다.  초대 교인들의 나눔은 인간이 구상한 유토피아 사상이나 공산주의 사상에서 생긴 것이 아니고 나누면 더 축복받는다는 원리를 따라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나눈 것도 아니다. 그들의 나눔은 성령충만을 통한 자발적인 헌신의 결과였다. 나눔은 성령충만의 핵심 증거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으로 성령충만을 추구할 때는 내 것을 다 버려도 좋다는 각오를 바탕으로 추구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하지만 사실상 성도의 삶의 터전 자체가 은혜의 현장이다. 이름 없는 들풀 하나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깃들어있다. 은혜의 바다에 살면서도 받을 은혜만 생각하고 나눌 은혜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이다. 나눔으로 비워진 마음의 창고에는 기쁨과 보람과 행복이 채워진다. 그때 외로움과 공허함도 사라지고 새로운 차원의 은혜의 세계가 열린다. 그것이 성령충만이다.  성령충만의 축복은 외적인 숫자로 계량화된 축복이 아니다. 성령충만의 축복은 십자가를 기꺼이 질 줄 아는 존재가 되는 축복이다.   스

탁월한 인물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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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4장 29-31절 29.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 복된 개척자가 되라 >  당시 사도들은 공회원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복음 전파를 포기하지 않고 개척자의 길도 포기하지 않았다. 아무도 간 곳이 없는 곳을 탐험하며 새 길을 찾는 개척자에게는 남과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내적인 힘이 있다. 개척자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어떤 위험도 개의치 않고 자기 길을 가기에 불굴의 힘과 의지도 있다. 그래서 남들이 여행이 힘들고 위험하다고 할 때 오히려 장비를 챙겨 개척의 길을 떠난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갔다. 그들은 한 번 뜻을 세우면 굽히지 않았다. 온갖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박해를 예수님의 공식적인 제자의 표식으로 여겼다. 십자가를 감수하는 담대한 개척정신을 갖추라. 십자가의 희생이 없는 믿음은 허구다. 마하트마 간디는 7대 불의로서 원칙 없는 정치, 부담 없는 부, 도덕 없는 거래, 양심 없는 쾌락, 인격 없는 교육, 인성 없는 과학, 희생 없는 종교를 들었다. 기독교 믿음의 대표적인 덕목이 희생이고 희생은 곧 개척정신이다.  희생을 모르면 개척자가 될 수 없다. 개척자는 생색나는 일에서는 자기를 감추고 어려운 일을 맞이할 때는 과감히 자기를 노출시킨다. 손해 앞에서 움츠러들면 큰일을 할 수 없다. 또한 개척자는 자기 약점에도 연연하지 않는다.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약점부터 생각하면 개척자가 되지 못한다. 늘 자기 장점을 주로 생각하면서 개척자의 길로 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역사의 주인공은 개척자들이다.  지금 쇠퇴하는 한국 교회가 다시 일어서려면 개척자와 개

바른 기도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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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4장 23-28절 23.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24.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25.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1. 환난 중에도 계속 기도하라  사도들은 공의회에서 풀려난 후 동료에게 가서 공회원들이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위협했다는 얘기를 전했다(23절). 그 위협을 듣고 그들은 더욱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 어려울 때 더 기도하고 어려움이 계속되어도 기도를 그치지 말라. 가끔 이런 의문이 든다. “왜 기도했는데 어려움이 그대로 있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나?” 왜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겠는가? 기도하면서 실망과 회의를 품지 말라.  기도한 후 곧 응답이 없다고 실망하는 것은 바른 모습이 아니다. 또한 원하는 것을 꼭 얻어내려는 집념이 지나친 기도도 바른 기도가 아니다. ‘간절한 소원을 가진 기도’와 ‘자기 소원에 집착하는 기도’는 겉으로는 같은 것 같지만 다르다. ‘간절한 소원을 가진 기도’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여지를 남겨두지만 ‘자기 소원에 집착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고 내 소원대로 응답되지 않으면 더 크고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고 언젠가는 기도한 것 이상의 응답을 주신다고 믿는 것이다. 기도할 때 어려움이 여전해도 계속 기도하고 핍박과 시험과 병이 그대로이고 핍박하는 남편이 회개하지 않아도 계속 기도하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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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4장 13-20절 13.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15.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16.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17.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 성령 충만의 축복 >  베드로와 요한이 못 걷는 자를 일으킨 일로 체포되어 유대 최고 의결기구인 산헤드린 공회원들 앞에 섰을 때 공회원들은 사도들에게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치유를 행했는지를 물었다. 그때 베드로는 당당하게 예수님을 증거했다. 복음을 잘 전하는 지혜로운 구변도 필요하다. 요새 말을 잘하는 것을 좋지 않게 보는 경향도 있지만 말을 지혜롭게 잘하면 사실상 유익이 많다. 진실하게 말하면서도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적인 말과 웃음을 주는 상큼한 말도 잘하고 특히 복음을 설득력 있게 잘 전하는 것은 복된 은사다.  공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한 변증을 듣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고 또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줄도 알았다(13절). 베드로와 요한이 무식한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서 이상히 여겼다는 뜻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는가? 성령충만 때문이었다. 교육은 많이 받지 못했어도 성령충만한 사람이 교육은 많이 받았어도 성령충만하지 못한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능

건강하게 되는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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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4장 5-12절 5.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 성령의 충만  초대 교회 당시에 힘 있는 형식적인 유대교는 예수님 안에서 참된 자유와 평안을 전하는 기독교 복음을 배타했다. 그래서 기독교의 첫 박해자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오랫동안 메시야를 기다린 그들이 막상 메시야가 오자 제일 먼저 거절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위가 올라가고 지식이 많아지고 형식이 정교해지고 기득권층이 되는 것이 겉으로는 복된 일이지만 사실상 그때 더욱 깨어 근신해야 한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부활의 복음을 전하자 누가 제일 반대했는가? 오랫동안 형식적인 종교로 기득권층이 된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었다(1절).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지만 날이 저물었기에 바로 재판하지 않고 이튿날까지 가두었다.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5절). 관리들은 유대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원들 중 제사장 그룹이고, 장로들은 각 족속의 리더들이고, 서기관들은 바리새파 율법사들이다. 산헤드린 공회는 제사장 24명, 장로 24명, 서기관 22명의 총 70명으로 구성되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가운데 놓고 물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결코 흔들리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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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4장 1-4절 1.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3.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 잘 믿어도 힘들 수 있다 >  보이는 낮도 아름답지만 보이지 않는 밤도 아름답다. 밤낮의 변화에는 더욱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익숙한 것에서도 기적의 손길을 느끼고 익숙한 것에서도 신비를 새롭게 깨닫는 의식 개혁을 이루라. 왜 현대인에게 우울감이 커지는가? 익숙한 것에서 기적과 신비를 발견하고 감탄하는 삶을 잃었기 때문이다. 기도와 예배의 형식화만 막아도 믿음은 크게 자란다. 소박하고 익숙한 삶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기적과 신비를 발견하는 삶이 거룩한 삶이다.  믿음이란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감사하며 소박한 일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느끼고 감사하는 것이다. 기적을 특별한 것으로 여기지 말라. 기적 자체보다 기적 후에 어떤 존재가 되느냐가 중요하다. 사람들은 기적을 좋아하지만 기적이 순탄한 인생대로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기적의 결과가 감사패나 개선문으로 귀결되기보다는 오히려 공갈과 협박, 핍박과 환난, 그리고 십자가로 귀결될 때도 많다.  사도행전 3장의 놀라운 기적 후 바로 4장에서 핍박이 다가온다.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말씀을 전하는 것을 싫어해서 베드로와 요한을 가두고 날이 저물었기에 이튿날까지 가두었다(1-3절). 이 장면은 “잘 믿고 사명을 따라 살아도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어떤 사람은 잘 믿으면 항상 좋은 일만 생긴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마귀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방심하면 마귀의 제일 공격대상이 된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마귀의 전략을 잘 알라. 마귀는 힘과 능력도 있고

복된 2020년을 위한 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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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고린도후서 5장 17절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 힘써 준비하며 살라  작년 초에 미국 기독교선교연맹(C&MA) 한국 총회가 생겼다. 비록 50여명의 목사가 속한 작은 총회지만 나라를 개국하는 것처럼 처음 총회가 생겨서 규칙, 조직, 자리, 업무 등의 문제로 여러 의견과 갈등이 있었다. 필자는 얼떨결에 2년 임기의 총회장이 되었다. 처음에는 겸손의 모범을 보이겠다는 명목으로 그리고 <월간새벽기도> 발행 때문에 바쁘다는 명목으로 많은 것을 사무총장에게 위임했다. 회의 주재도 시켰다. 그러자 회의 중에 배가 산으로 가는 길이 많이 생겼다.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아 금년 여름부터 필자가 회의를 직접 주재하겠다고 선언했다. “하나님! 저는 회의를 잘 주재할 줄 모릅니다. 무대를 싫어하고 남 앞에 서기를 싫어하고 남 앞에서 말하기를 싫어하는 제가 어떻게 회의를 잘 이끌겠습니까? 두렵고 떨립니다.” 그때 하나님이 마음에 감동을 주셨다. “이 목사야! 못한다고 미리 단정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준비해봐라.” 그래서 돌출 발언, 돌출 의견까지 미리 기도와 묵상 가운데 예상하고 준비해서 2달 전에 중요한 총회 신학연구원 상임위원회 회의를 잘 인도할 수 있었다.  3일 전에는 2020년 총회 준비를 위한 더욱 중요한 확대 실행위원회 회의를 열었다. 위원 8명 전원이 참석했고 그 중에 6명이 65세가 넘는 목사였다. 그 회의도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가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기도하며 준비했다. 4시간 반 이상 회의를 인도하는데 여러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한 번도 소리 높이는 일이 없이 은혜롭게 끝났다. 다양한 변수를 고려해 미리 준비하니까 회의를 잘 이끌 수 있었다.  철저한 준비가 권위를 세워주었다. 그 회의를 은혜롭게 주재한 후 뿌듯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힘써 세심하게 회의를 준비하니까 남 앞에 서면 얼굴이 붉어지는 사람도 회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