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020의 게시물 표시

겸손하게 살기를 힘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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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오바댜 1장 3-4절 3.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4.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겸손하게 살기를 힘쓰라 >  사람은 명예를 추구하는 존재다. 그것은 잘못이 아니다. 자기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많은 선이 이뤄진다. 정당한 방법으로 명예를 추구하는 것은 비난받지 말아야 한다. 명예 추구가 선용됨으로 인간 역사의 발전이 이루어졌고 거룩한 명예 추구로 천국 확장도 이뤄졌다.  자기가 이룬 업적에 대해 자랑할 수도 있다. 겸손하다는 것이 꼭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자랑한다는 것이 꼭 교만한 태도는 아니다. 참된 자랑거리를 가지고 떳떳이 자랑하며 사는 것은 겸손도 아니고 교만도 아닌 일반적인 삶이다. 오히려 자랑거리도 없이 의를 자랑하는 것이나 자랑하지 않는 겸손을 은근히 자랑하는 것이 더 교만일 수도 있다.  옛날에 한 유명한 희랍 철학자가 속살이 보이는 누더기 옷을 입고 다니자 사람들은 훌륭하다고 했다. 그러자 다른 철학자가 그 모습을 보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내가 보니 찢어진 누더기 사이로 교만이 비쭉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네. 자네들은 그렇게 살지 말게.” 겸손을 가장해 비쭉이 드러난 교만을 조심하라. 자랑 문제에서 나의 자랑거리를 만들기에 힘쓰고 남의 자랑거리를 인정해 주려는 넉넉한 마음을 가지라.  어떤 사람은 지나칠 정도로 남의 자랑거리를 봐주지 못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겸손한 줄로 여긴다. 남의 자랑거리를 봐주지 못하는 모습은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겸손한 성품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는 시기와 질투 때문인 경우가 많다. 의를 자처하는 사람은 남의 자랑을 무조건 싫어한다. 남의 인생을 깎아 내리는 데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말고 나 자신이 적절한 자랑거리를 가지려고 더욱 힘쓰고 남의 적절한 자랑은 너그럽

성도가 붙잡혀야 할 4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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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16장 25-26절 25.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 성도가 붙잡혀야 할 4가지 >  예수님은 남을 복되게 하라고 하는데 세상은 나를 복되게 하라고 한다. 예수님은 약자 곁에 서는 강자가 되라고 하지만 세상은 강자 곁에 서는 약자가 되라고 한다. 세상 것에 붙잡혀 살지 말고 좋은 것에 붙잡혀 살라. 무엇에 붙잡혀 살아야 하는가? 1. 성령  어느 날 바울 선교 팀이 빌립보의 한 기도처로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한 여종을 만났다(16절). 그 여종은 점으로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었는데 바울 일행을 알아보고 몇 날을 계속 소리쳤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실제로 맞는 말이지만 너무 사람을 높이는 느낌이 든다. 그런 말을 들으면 영성이 없는 사람은 좋아하지만 영성이 있는 사람은 부담스럽게 여긴다. 칭찬이 너무 지나치면 참된 영성을 가진 사람은 부담스럽다 못해 괴롭게 느낀다.  그 여종이 여러 날을 계속 그렇게 말하자 바울이 괴로워서 마침내 돌이켜서 귀신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해서 그 여종에게서 나오라고 했다. 깊은 영성을 원하면 사람의 칭찬을 너무 좋아하지 말라. 칭찬을 과하게 하는 사람은 주의하라. 과도한 칭찬 중에는 부실한 아부성 칭찬이 많다. 어떤 사람은 속마음을 감추고 거짓으로 칭찬한다. 마귀는 영혼과 공동체와 인간관계를 무너뜨리려고 칭찬을 이용할 때가 많다.  남이 띄워주는 말에 마음이 너무 붕 뜨지 말라. 거짓 칭찬은 힘써 멀리하라. 칭찬은 원래 세워주려고 하는 것이지만 마귀가 개입된 칭찬은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귀신 들린 여종이 하나님까지 언급하며 바울 일행을 칭찬하는 것을 듣고 그 내면의 의도를 알고 괴로워하다가 결국 귀신을 쫓아냈다. 이 장면은 “하나님, 예수님,

Blessed Bread 축복받은 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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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이야기의 “시작”이 엉망이라고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미래가 밝지 못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더 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목적을 갖고 또 목적을 위해 당신을 지으시고 당신을 통해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 오셔서, 당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 당신 안에 성령이 거하게 하시고 당신의 본 모습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마태복음 26:28). 바로 당신을 ‘복 주시기’원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Maybe the “beginning” of your story feels messed up. Maybe you don’t think there’s much of a future. But there’s a bigger story. It’s a story of a God who made you on purpose and for a purpose, who took pleasure in you. It’s a story of God who came to rescue you (Matthew 26:28); a God who put His Spirit in you to renew you and recover your identity. It’s a story of a God who wants to bless you.—Glenn Packiam ... Dear Jesus, I place my life like bread in Your hands. Only You can return me to my origin. Only You can carry me to my destiny. Jesus, You are the author and the finisher of my faith. 사랑하는 예수님, 빵과 같은 제 삶을 주님의 손에 맡깁니다. 오직 주님만이 저를 제 본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으며, 저를 제 운명으로 이

회개는 회복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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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아모스 9장 11-12절 11.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12.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라 >  하나님은 먼저 심판의 경고로 교만한 사람에게 회개 기회를 주신 후 회복 기회를 주신다. 교만은 최악의 죄로서 패망의 선봉이고 반대로 겸손은 은혜의 길을 여는 초석이다. 겸손이란 허리를 한껏 낮추고 최대한 자기를 낮추는 말을 하는 것만이 아니다. 참된 겸손은 참된 회개를 통해 온다. 사람은 진심으로 회개할 때 가장 겸손해진다. 겸손의 깊이가 은혜의 높이다.  시편 기자는 고백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시 130:1).” 깊이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뜻이다. 깊이 파면 언젠가 생수가 터지듯이 깊이 회개하면 반드시 생명수가 터진다. 회개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내면에 생수를 가진 성공이 참된 성공이다. 성 어거스틴은 기도했다. “나의 주여! 당신을 저에게 주소서.” 그것은 “주님! 저를 받아주소서.”라고 하는 깊은 회개 고백이다. 그 고백이 있을 때 참된 생수를 얻고 조만간 복된 삶의 열매도 맺힌다.  복 받는 것이 어렵지 않다. 회개는 복을 부르고 불평은 화를 부른다. 왜 사람이 불평하는가? 마음이 세상 기름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회개는 감사와 비례한다. 어려움이 생겨도 “하나님! 그래도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을 잃지 말라. 세상에서 형통한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하지 말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라. 힘들어도 불평하면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말고 감사하면서 떳떳한 모습을 보이라.  세상에서는 의인이 못 사는 희한한 현실이 많이 목격되어 눈앞의 현실만 보지 말라. “사람 팔자는 관 속에 들어갈 때 안다.”라는 중국 속담처럼 참된 성공은 하나님 앞에 설 때 안다. 세상의 칭찬과 성공에 너무

말씀을 힘써 나눠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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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아모스 8장 11-13절 11.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13.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 < 말씀대로 살려고 하라 >  아모스는 사회적 부정의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문 앞에 이르게 된 가장 큰 원인을 말씀의 기갈로 여겼습니다. 결국 사회적인 부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말씀을 바로 가르치고 선을 도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삶이 힘들고 길이 잘 보이지 않을 때마다 가장 먼저 찾아서 봐야 할 인생 지도다. 세상 것에 집착하면 불안과 피곤이 떠나지 않지만 말씀에 마음의 닻을 내리면 늘 평안과 활력이 솟는다.  기도도 말씀 안에서 기도할 때 능력 있는 기도가 된다. 지난 20세기에는 “기도는 응답이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는 축복신학이 열풍을 일으켰다. 물론 큰 의미에서 “기도는 응답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선언이 영혼을 시험과 부작용과 허무주의에 빠뜨리는 잘못된 기복신앙이 되지 않게 하려면 “하나님의 뜻과 말씀 안에서 기도는 응답이다.”라고 인식하라. 그래야 성경적인 기도에 대한 개념이 왜곡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했다(요 15:7). 축복신학은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이룬다.”는 말씀에 초점을 맞추지만 사실상 더욱 중요한 말씀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란 조건절 말씀이다. 즉 말씀 안에서 기도하라. 가끔 보면 새벽기도회 때 말씀이 끝나고 5시 40분쯤에 슬쩍 와서 기도만 하는 사람이 있다. “말씀을 듣기 싫다! 기도만 하겠다!”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용기있게 일어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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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16장 6-10절 6.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 관심의 폭을 넓히라 >  사도 바울은 관심의 폭이 넓었다. 그는 이방인도 구원 대상으로 삼고 브루기아, 갈라디아, 무시아, 드로아 외에도 아시아와 유럽의 숱한 지역으로 복음을 들고 찾아갔다. 그런 폭넓은 관심과 자세가 그를 성공적인 인생으로 만들었다. 관심의 폭을 넓히면 삶은 힘들어질 수 있지만 그만큼 성공 가능성과 보람도 커진다. 관심의 크기는 인격의 크기도 나타낸다. 관심이 자신이나 자신의 가정에서 끝나게 하지 말라.  가정에 관심을 쏟는 만큼 교회에도 관심을 쏟고 더 나아가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 및 후대를 위해 축복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에까지 관심의 폭을 넓히라. 때로는 대의를 위해 자기 것을 양보하라. 그러면 손해만 볼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 마음을 기쁘게 보고 더욱 놀라운 축복으로 채워주신다. 자녀에게도 부모의 양보하는 모습은 무언의 큰 감동을 준다. 하나님의 뜻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부모의 모습은 자녀에게 가장 위대한 교육이 된다.  조선 말기에 한 관리가 꽤 많은 유산을 남겼다. 둘째 아들은 대부분의 유산을 첫째 아들에게 돌렸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기에 믿음으로 양보하면 그 당시에는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전체적인 의미에서는 결코 손해 보게 하지 않으신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의로운 성도의 후손은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처럼 번성하게 하신다. 실제로 그 관리의 첫째 아들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사명을 따라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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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16장 1-3절 1.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3.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 겸손한 사람이 되라 >  2차 선교여행 때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떠났고 바울은 실라를 동역자로 택해 육로로 수리아와 길리기아를 다니면서 교회들을 굳게 했다. 그리고 계속 전진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렀는데 거기서 젊은 제자 디모데를 만났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였다. 요새 많은 사람들이 성공 비결을 찾으려고 애쓰는데 성공 비결은 의외로 단순하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칭찬 받는 자가 되면 성공 가능성이 커진다. 칭찬 받는 사람이 되려면 겸손한 사람이 되라  바울이 디모데를 믿음의 아들로 택한 것은 디모데가 믿는 형제들로부터 칭찬 받는 겸손한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겸손하면 더 칭찬받는다. 칭찬을 더 취하겠다고 자기를 높이면 오히려 칭찬을 잃고 자기 영혼도 망가진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란 의식을 가지는 것도 필요하지만 진지한 자기사랑과 교만한 자기도취는 다른 것이다. 진지한 자기사랑은 영혼을 풍요롭게 만들지만 교만한 자기도취는 영혼을 고사시킨다.  IMF는 있는 척 하는 태도를 버리고 내실을 기하라는 의미로 왔다. 인생에 IMF도 있는 척 하는 태도를 없애라는 의미로 온다. 명문대를 나와도 겸손하면 훌륭하지만 교만하면 만병의 근원과 나르시시즘의 원천이 된다. 있는 척 하는 모습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든다. 살기 힘들면 위신을 버리고 공사판에서도 일해야 되는데 명문대 출신이란 과거의 타이틀 때문에 그냥 죽어간다. 요새 거품을 제거해야 한다는 말이 많다. 그 중에 꼭 제거해야 할 거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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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레위기 26장 14-18절 14.그러나 너희가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며 15.내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내 법도를 싫어하여 내 모든 계명을 준행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배반할진대 16.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너희가 파종한 것은 헛되리니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임이며 17.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의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 18.또 만일 너희가 그렇게까지 되어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일곱 배나 더 징벌하리라 < 과감히 이단을 멀리하라 >  1987년 여름 오대양 용인공장 천장에서 사장과 종업원 32명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경찰은 동반자살에 응한 이들이 약물을 먹고 실신했을 때 주동자가 그들을 목 졸라 죽인 뒤 자살했다고 결론 내렸다. 사장 박순자는 구원파에서 분파해 나온 오대양 교주였다. 그들은 거액을 빌린 채권자를 집단 폭행한 후 경찰에 쫓기면서 공장 천장에 며칠간 숨었다가 결국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때 이런 메모도 발견되었다. “못 견디겠다. 고통 없이 갈 수는 없을까?”  그때 교주는 자살을 교사하며 이렇게 선동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고통 없는 천국으로 같이 떠나 영생을 누리며 삽시다.” 판단력이 떨어진 채 무엇인가에 쫓기고 자기 정체가 드러날 것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다 몸도 탈진하면 그런 선동에 넘어가기 쉽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일은 종교사기에 걸려드는 일이다.  1978년 11월 18일, 남미 가이아나의 존스타운에서 인민사원(Peoples Temple) 교회 신도들이 집단 자살을 했다. 교주 짐 존스는 처음에는 소외된 자의 대부처럼 행세했지만 점차 신도의 노동력과 재산 탈취, 핵 공포에서 안전한 낙원으로의 이주 사기, 메시야 행세,

이별을 두려워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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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15장 36-41절 36.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 이별을 두려워하지 말라 >  할례 문제로 생긴 갈등이 잘 해결된 후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머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바울이 바나바에게 1차 선교 여행 때 세워진 교회들을 둘러보자고 했다. 그 비전에서는 일치했지만 마가를 동행시키는 문제로 인해 크게 다투다가 이별해서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 육로를 이용해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갔다.  본문 39절에 언급된 “서로 심히 다투어”라는 말씀의 원어적인 의미를 토대로 리얼하게 표현하면 “서로 박 터지게 싸워서”라는 강한 뜻이다. 그들은 감정이 고조되어 멱살을 잡고 싸우기 일보직전까지 갔다가 결국 갈라졌다. 누가 옳은가? 둘 다 옳다. 다만 둘 사이에 관점이 달랐다. 물론 싸움의 원인은 바울이 제공했다. 모든 것을 품고 마가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고자 했던 바나바의 제안을 바울이 냉정하게 거절했기 때문이다.  바울이 마가의 인격 자체를 미워한 것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얼마든지 마가를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지만 공적으로는 냉철하게 현실을 판단해서 선교라는 중대한 사명에 적합지 않다고 여겨서 마가의 동행을 거부한 것이었다. 사도행전을 쓴 누가가 그 부끄러운 장면을 언급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왜 그냥 언급했는가? 첫째, 위대한 믿음의 선진도 보통 사람과 똑같은 성정

문제를 두려워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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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15장 28-31절 28.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29.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30.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31.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 성령충만의 표식 >  영성을 내세우는 사람이 교만하게 보이는 이유는 그의 영성이 타인과 공감되는 타인지향적인 영성이 아니고 영성을 과시하는 자기중심적인 영성이기 때문이다. 교만한 가짜 영성주의자는 믿음의 선진들이 확정지은 교리와 신경을 제일 싫어한다. 반면에 참된 영성을 가진 사람은 믿음의 선진들이 확정지은 교리와 신경도 중시한다. 자신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사적인 교회 회의에서 정한 교리도 그 회의의 참여했던 구성원들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그 교리와 신경을 확정지었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1차 예루살렘 교회 회의에서 결정한 것은 인간적으로 중요한 사람들이 모여 회의해서 인간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충분한 기도와 함께 성령의 인도를 따라 회의한 후 결정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그 결정 사항을 이방지역에 널리 알리면서 결정 주체를 언급할 때 “성령과 우리는”이란 표현을 썼다(28절).  성령충만은 믿음의 선진들이 확정한 교리도 최대한 존중하는 것이지 기존 교리를 뒤엎는 것이 아니다. “나는 성령의 인도를 받기에 사람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라는 자세로 살지 말라. 예루살렘 교회 리더들은 “성령과 나는”이라고 하지 않고 “성령과 우리는”이라고 했다. 성령충만한 사람이란 전체 공동체를 생각하는 사람이고 성령충만했던 믿음의 선진들이 확정한 교리도 존중하는 사람이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성령충만의 핵심 표식 중 하나가 순종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대개 3중적인 축복, 즉 번성의 축복, 안전의 축복, 그리고 동

교리와 신학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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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15장 25-29절 25-26.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27.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28.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29.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 교리도 필요하다 >  예루살렘 교회 회의에서 결론 전까지는 격론을 벌였어도 결론을 내린 후에는 더 이상 이의를 달지 않고 “만장일치로 결정했다.”라고 선포했다. 아름답고 멋진 모습이다. 그처럼 회의에서 어떤 결론을 내렸으면 “나는 그렇게 동의하지 않았다. 이렇게 마음에 안 드는 결정을 내리면 나는 빠지겠다.”라는 식으로 딴 소리를 내지 말라. 아주 불가피한 사정이 있다면 적극 협조는 못할지라도 결정 자체를 뒤바꾸려고 하지는 말라. 회의에서 내 의견이 채택되지 않고 남의 의견이 채택되어도 그 결론을 밀어주라.  왜 교리나 신경이 필요한가? 한번 결정된 것에 대해 딴 소리를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사람이 만든 교리가 완벽할 수는 없어도 꼭 필요하다. 반듯한 교리가 없다면 인간 역사가 끝날 때까지 통일된 의견이 나올 수 없다. “내가 이런 체험을 했는데...”라고 하면서 딴소리를 계속 하면 성경은 끊임없이 업데이트 되어야 하고 그렇게 한 사람의 체험으로 성경이 계속 업데이트되면 성경은 더 이상 성경일 수 없다.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는 성경도 필요하고 확고한 신경도 필요하다. 또한 교리와 신학도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영성을 내세우면서 교리를 영성을 막고 성령을 제한하는 걸림돌처럼 여기지만 교리의 목적은 성령을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영성과 자기 체험을 내세워 자꾸만 말씀 밖으로 나가려는 것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다.  성경은 완전하지만 성

리더십을 얻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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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15장 13-18절 13.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15.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16.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 말씀을 앞세우라  야고보는 회의의 결론을 내릴 때 “기록된 바”라고 말하며 구약의 아모스 말씀을 인용해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그가 말씀을 많이 알고 최대한 존중했다는 암시다. 특히 야고보는 예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 정확히 많이 알고 있었다. 야고보가 쓴 야고보서는 신약성경의 어떤 서신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이 많이 인용되었다.  사람들은 보통 바울이 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중시한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중시해서 아내도 ‘갈라디아’라고 불렀다. 반면에 야고보서는 행위를 강조했다고 해서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비하했다. 그것은 루터의 잘못이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예수님을 강조하면서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라는 교리 설명에 탁월했지만 정작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도 인용되지 않았다.  교회생활에 관한 탁월한 교훈으로 가득 찬 고린도전후서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 곳은 한 곳도 없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처음 뵙고 나서 구약 율법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재해석함으로 복음을 변증한 가장 위대한 사도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과 직접 지낸 적이 없었기에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반면에 야고보는 야고보서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상당히 많이 인용했다. 야고보서 말씀 중 약 3분의 1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말씀을 확실히

축복의 통로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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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16장 11-15절 11.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4.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 축복의 통로가 되는 길 >  힘들고 외롭고 다급할 때는 잠깐의 좋은 만남과 휴식조차 좋은 기억으로 오래 남는다. 살다 보면 가끔 절박한 상황에서 좋은 만남으로 고독감이 사라지고 큰 힘과 위로를 얻고 다시 일어설 때가 많다. 지치고 힘들고 고독한 사람에게 기쁨과 위안과 행복을 주는 만남 대상이 되라.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일은 누군가를 위한 축복의 통로가 되는 일이다. 본문에는 바울의 축복의 통로가 되었던 한 여인이 나온다. 바로 루디아다. 루디아처럼 축복의 통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주일을 지키라  어느 날 사도 바울이 2차 선교여행 중 소아시아(터키)의 끝 부분인 무시아에 이르렀다. 거기서 선교 전략에 따라 소아시아 북동쪽의 비두니아로 가려고 할 때 성령님이 그 길을 막으셨다. 할 수 없이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유럽의 마게도냐 사람이 환상 중에 나타나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라고 했다. 그 환상에 이끌려 배를 타고 마게도냐로 떠났다. 그리고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인 빌립보에 도착했다.  며칠 후 안식일에 그들을 회당을 찾았다. 유대인은 어디서든지 남자 10명 이상 모이면 먼저 회당부터 세웠다. 회당이 없으면 대개 강가의 기도처에 모여 안식일을 지켰다. 그때 바울 일행은 빌립보 지역에

균형 잡힌 믿음을 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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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15장 6-11절 6.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 회의를 지혜롭게 활용하라 >  회의할 때 자존심을 내세우면 결정 내리는 과정은 사라지고 말싸움에서 이기려는 상황만 펼쳐진다. 말싸움은 수치와 원한과 맹목적인 증오심을 낳아 바른 판단을 내리기 더 어렵게 만든다. 토론에서 지고도 그 과정에서 지혜를 발견해 내어 삶에 적용하는 사람이 진짜 승리자다. 회의를 잘못하면 회의 무용론에 빠지지만 회의를 잘하면 공동체의 질서와 시스템 확립에 매우 유용하고 리더십도 강화시키고 창조적인 발전도 이룰 수 있다.  본문에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 회의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회의다. 회의에서 바리새파 출신 신자들은 “이방인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유대교를 믿을 때도 지나친 율법주의로 문제가 많았는데 복음을 받아들인 상황에서도 율법주의적인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마치 무속신앙을 가졌다가 믿게 된 사람이 점과 푸닥거리를 앞세운 무속신앙의 틀을 따라 믿으려는 모습이다.  유대인은 할례를 몸에 새긴 하나님의 언약 표식으로 여겼기에 할례를 행해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생긴다고 여겼다. 그런 종교 문화적인 바탕에서 믿음을 가진 일부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어도 할례는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그런 주장은 복음의

협조적이고 사명적인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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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15장 1-3절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 협조적인 삶을 살라 >  당시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이방인도 할례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했는데 그 주장은 이방인 성도가 많았던 안디옥 교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주장으로 안디옥 교회가 술렁이고 교인들의 믿음이 흔들리자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의 기본 원리를 깨뜨리는 그들과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을 했다. 또한 안디옥 교우들은 그 문제를 상의하도록 바울과 바나바와 및 교인 중 몇몇 형제를 예루살렘의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결정했다.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선교 여행을 통해 기적적인 체험을 많이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도 많이 듣고 기적적인 체험도 많이 한 우리가 사도나 장로들과 따로 무슨 대화를 하는가? 하나님만 믿고 나아가자.”라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체험을 내세워 일방적인 주장을 하지 않고 사도들 및 장로들과 이방인 구원의 문제를 협의하려고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런 겸손하고 협조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다.  아무리 바른 주장을 가지고 있고 기적적인 체험을 했어도 지도자와 선배들의 권위를 힘써 존중하라. 질서를 무시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사자인데...”라고 하며 나만이 진리의 사자인 것처럼 하면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시지 않는다. ‘이단적인 주장’도 잘못된 것이지만 ‘이단적인 태도’도 잘못된 것이다. 주장이 바르다고 해도 태도가 바르지 못하면 그런 태도를 통해 좋은 열매가 나올 수 없다.  내 의견과 다른 의견으

충성스럽게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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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14장 19-22절 19.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20.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 충성스럽게 살라 >  더베에서의 복음 전파는 루스드라에서와는 달리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가? 죽을 고난을 당하면서도 오뚝이처럼 일어서서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의 모습을 보거나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속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저 사람이 말하는 복음은 진리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을 위해 저렇게 똑똑한 사람이 목숨을 걸고 저럴 수는 없다.’ 그래서 더베에서는 많은 제자를 얻을 수 있었다.  그 후 바울은 다른 새로운 갈 곳도 많았지만 다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돌아갔다(21절). 자기를 박해했던 곳들에서 자신이 뿌린 복음의 씨가 어떻게 열매 맺는지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기대를 하며 원수가 많고 한이 맺혔던 그곳들로 다시 사랑의 복음을 들고 들어갔다.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인가? 그것이 충성이다. 충성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고 하나님의 뜻을 신실하게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께 충성스러웠다. 내가 하나님께 충성할 때 충성스러운 사람이 나를 따른다. 다윗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베들레헴 성문 곁의 우물물을 마시고 싶다고 하자 다윗의 세 장수가 목숨을 걸고 적진을 뚫고 나가 그 우물물을 구해 다윗에게 바쳤다. 충성은 목숨을 걸어야 가능하다. 누가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는가?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만이 온전히 충성할 수 있다. 하나님께 충성하면 뿌리 뽑힌 상황이 새롭게 뿌리 내리는

자기 우상화를 극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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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14장 11-15절 11.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13.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15.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 자기 우상화를 극복하라 >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자를 고친 것을 보고 무리가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쳤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그러면서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고 했다. 또한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려고 했다. 그러자 두 사도는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 그들의 행위를 막았다. 두 사도는 자기 우상화의 본능을 극복했다. 그래서 진짜 큰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자기 우상화는 자기 힘으로 무엇을 얻었다고 착각할 때 생긴다. 그런 착각에 빠지면 남을 우습게 알고 남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무엇을 줄 때도 하나님의 것을 나눠 준다는 선교 마인드로 주지 않고 자기 것을 나눠 준다는 동정 마인드로 준다. 그러면 인물이 되기 힘들다. 왜 바울이 위대한 인물이 되었는가? 사도직을 비롯한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다고 고백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많은 청년들이 결혼 전에 근심한다. “내가 결혼하면 좋은 배우자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그러다가 얼떨결에 결혼하는데 의외로 잘한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회개는 빠를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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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누가복음 13장 1-5절 1.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2.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 능력 사기를 주의하라 >  일전에 TV 프로그램에 나와 유명해진 한 건축가의 비리가 밝혀졌다. 그는 미국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어학원에서 공부한 후 미국 대학에서 건축 디자인을 공부했다고 학력을 속여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대학교수와 대기업 전무가 되고 수많은 사람을 속여 거액을 착복했다. 세상에는 그런 일이 종종 있다. 그러나 기독교 리더까지 학력을 속여 돈과 명예를 탐하고 심지어 교주 행세를 하면 기독교와 교회는 그 존재 의미가 크게 훼손될 것이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선에서 어느 정도 자기 미화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미화가 지나쳐 거짓말 수준까지 되다가 그 거짓말로 유명해지면 나중에는 그의 삶을 대략 아는 사람들이 거짓으로 사는 그 모습을 보고 기막히게 여긴다. 그러다가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속출하면 언젠가 그를 아는 누군가의 폭로로 순식간에 추락한다. 결국 거짓말과 거짓 삶으로 유명해지는 것처럼 위태한 것은 없다.  가끔 유명인의 미국 명문대 학력 의혹이 불거진다. 정상 과정을 밟았다면 학력 의혹은 쉽게 해명되지만 비정상적인 과정을 밟았거나 학력 위조를 했다면 결국 비참해진다. 만약 학력 위조가 지위와 명성을 얻는 지렛대가 되거나 사람들의 몸과 마음과 물질을 빼앗는 수단이 되면 학력 사기가 된다. 학력 사기를 가볍게 여기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그로 인해

자기 한계를 극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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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14장 8-10절 8.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9.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 구원의 믿음을 가지라 >  본문에는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을 일으키는 장면이 나온다.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들었지만 특별히 나면서부터 발을 쓰지 못했던 사람이 그 말씀에 빨려들었다. 그때 바울이 주목하면서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믿음은 말씀을 바탕으로 한 구원의 믿음이었다.   믿음에는 2가지가 있다. ‘구원받지 못하는 믿음’과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다. 긍정적인 사고방식도 믿음의 형태는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고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힘이 난다. 그러나 그런 믿음의 형태가 꼭 구원받을 만한 믿음만은 아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은 구세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이외에 다른 것을 믿는 것은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아니다.  한 아내가 투병하는 남편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남편이 나을 줄 믿습니다.” 그런 기도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주의할 것은 ‘남편이 나을 것’을 믿음 대상으로 여기면 믿음의 본질이 흐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남편의 치유를 위해 기도할 때 ‘남편이 나을 것’을 믿기보다 ‘남편을 낫게 하실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남편이 나을 것’ 자체를 굳게 믿는 것은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기복주의의 형태가 된다.  ‘남편이 낫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gift)이다. 남편을 낫게 하시는 분(giver)은 하나님이다. 아무리 다급해도 하나님(giver)보다 선물(gift)을 더 사모하지 말라. 믿음의 대상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참된 믿음과 기복

지혜로운 후퇴는 전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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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14장 4-7절 4.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5.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7.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 지혜로운 믿음 >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서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고 그들을 통해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자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었다. 그때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다. 지역 관리들까지 두 사도를 박해한 것을 보면 그 박해는 단순한 방해가 아닌 조직적인 박해였다. 심지어는 돌로 치려고도 했다. 그러자 두 사도가 알고 도망해서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 장면에 대해 어떤 사람은 믿음을 오해하고 이렇게 말한다. “아니! 사도라는 사람들이 이고니온에서 그냥 돌에 맞아죽는 길을 택하지 어떻게 치사하게 그렇게 도망가나?” 그러나 믿음이 만용은 아니다. 피할 때는 피할 줄도 알고 물러날 때는 물러날 줄도 알라. 순교가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순교는 순교할 때에 해야 좋은 것이다. 무조건 순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때를 가리지 않고 무작정 순교하겠다고 하는 것은 순교 콤플렉스다. 보다 더 큰일을 위해 때로는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한다.  어떤 때는 위험을 무릅쓰는 행위가 유익이 없고 오히려 무모해 보인다. 그런 식의 죽음은 칭찬받을만한 순교가 아니라 비난받아 마땅한 분별없는 죽음이 될 수도 있다. 말씀의 지식을 잘 닦아 2가지의 차이를 잘 구분하라. 믿음이 주는 담대함을 오용해서 일을 저질러 놓고 보는 사람이 많다. 교회를 건축할 때 교회의 형편도 살피지 않고 큰 건물을 무작정 계약하는 것이 담대함이 아니라 믿음을 앞세운 욕심이 될 때도 많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란 사상을 무조건 믿음으

용기와 사명을 잃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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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13장 46-48절 46.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 용기를 잃지 말라 >  유대인들이 시기심을 가지고 반박하고 비방하자 바울과 바나바는 더욱 담대하게 말했다(46절). 그런 용기가 필요하다. 가끔 까닭 없는 고난이 찾아올 수 있다. 왜 성도에게 고난이 주어지는가? 그 고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가끔 고난이 주어지는 상황을 허용하신다. 고난이 있으면 신앙이 생동감 있게 되고 기도가 순수하고 간절해진다. 반면에 고난이 전혀 없으면 믿음과 정성을 잃기 쉽다.  히틀러 시대의 유대인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 박사는 고난 중에 포기한 사람에게는 고난이 저주지만 고난의 의미를 깨닫는 자에게는 고난이 축복이 된다고 했다. 심한 고난을 당해도 고난의 깊은 의미를 알면 고난은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축복의 원천이 된다. 고난에는 하나님의 원대한 섭리가 있다. 고난은 하나님의 큰 설계도 속에서 이뤄진 사건이기에 고난에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하나님의 지혜도 담겨 있다. 고난의 겨울에 낙심하지 말라. 때가 되면 따뜻한 봄이 찾아온다. 겨울은 봄을 이기지 못한다.  세상을 온통 고난의 겨울이 지배한 것 같아도 겨울에는 겨울의 추위 가운데 즐기며 살라. 고난의 겨울을 없애지는 못해도 고난을 이겨내는 봄을 앞당길 수는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차가운 세상에 봄소식을 전해주는 거룩한 제비 성도는 될 수 있다. 환경에 매이지 말고 상황에 얽히지 말라. 추위가 길어져도 사명의 자리에서 이탈하지 말라. 세찬 바람에 나무가 쓰러지면 다시 일어서지 못하지만

역사의식을 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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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13장 16-23절 16.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17.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19.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20.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21.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23.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 역사의식을 가지라 >  성숙한 사회는 역사의식을 중시한다. 역사를 통해 얻은 교훈이 복된 내일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역사의식은 개인의 삶에서도 중요하다. 한 사람이 사업에 실패하면 그에게는 역사의식에 따라 3가지 반응이 생긴다. 첫째, “이번 실패는 팔자소관이다.”라고 반응하는 운명적인 역사의식이다. 이런 의식을 가지면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려고 하지 않고 다시 사업할 때 운수가 좋기를 바라며 한 번 더 도박할 것이다.  둘째, “이번 실패는 나의 잘못된 결정 때문이었다.”라고 반응하는 이성적인 역사의식이다. 이런 역사의식을 가지면 새로 사업을 시작할 때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힘쓸 것이다. 이성적인 역사의식은 운명적인 역사의식보다는 바람직한 삶의 태도지만 좋은 분석이 내일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셋째, “이번 실패에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다.”라고 반응하는 섭리적인 역사의식이다. 이런 역사의식을 가지면 실패 요인을 분석하면서도 그 실패를 허용하신 하나님의 뜻도 묻는다. 그리고 실패를 통해 선을 이루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고 실패의

담대한 믿음으로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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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사도행전 23장 22-24절 22.이에 천부장이 청년을 보내며 경계하되 이 일을 내게 알렸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고 23.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 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기병 칠십 명과 창병 이백 명을 준비하라 하고 24.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 <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 >  며칠 전 인도네시아로 출장 간 57세 한국인 여성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을 걱정하다가 호텔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녀는 1월 22일 중국 출장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 2월 8일 아침 목에 약간 통증을 느껴 병원에 갔는데 특별한 조치는 없었다. 그 후 2월 16일 인도네시아로 출장 가서 5일간 불안해하다가 극단적 선택을 했지만 사후 검사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는 없었다. 혼자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여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사람은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대상 때문에 죽기보다 염려나 두려움 자체로 죽는 경우가 더 많다. 건강에 주의하되 건강 염려증에 걸리지는 말라. 바이러스 공포에 싸여 수시로 체온을 재고 목의 통증을 살피고 확진자들 동선을 쫓으면 멀쩡한 사람도 두려움에 빠지기 쉽다. 코로나에 감염된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감염된 것이다. 그런 사람을 보면 답답하다거나 예민하다고 하지 말고 차분하게 괜찮은 이유를 설명해주고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해주라. 진짜 두려워할 것을 보건 지침을 어기는 부주의다.  보건 지침만 잘 준수하면 신종 코로나도 일종의 독감으로서 노인 폐질환자한테는 위협적이지만 보통 사람은 감염되어도 거의 완치된다. 신종 코로나로 아이들이 죽는 사례가 거의 없는 것은 건강하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진짜 무서운 것은 코로나 감염 상황을 감춰 주변인을 감염시키는 것과 가짜 뉴스다. 가짜 뉴스에 빠지면 두려움이 심해지고 의존적 우울증에 걸려 이단에 빠지는 것과 비슷한 증상이 나타난다.  가짜 뉴스는 심약한 사람에게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