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18의 게시물 표시

회복의 때는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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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은 대로 거둔다 >  어느 날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음란한 매춘부와 결혼하라고 했다((2절). 이스라엘의 영적인 음행을 경고하려고 하나님이 그의 삶을 활용하셨다. 그 명령대로 호세아가 고멜과 결혼하고 둘 사이에 첫 아들이 생기자 하나님은 그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짓게 했다(3-4절). 이스르엘은 ‘하나님이 흩으신다’는 뜻으로 바알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을 쳐서 널리 흩으실 것임을 경고하려고 주신 이름이다.  그 후에 고멜이 잉태해 딸을 낳자 하나님은 그 딸 이름을 로루하마라고 지으라고 했다(6절). 루하마는 ‘긍휼히 여기다’는 뜻인데 ‘로’는 영어로 ‘노(No)’를 뜻하기에 로루하마는 ‘긍휼이 여기지 않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바알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다는 뜻으로 그런 이름을 주셨다. 그처럼 북 이스라엘은 무섭게 심판하지만 남 유다에 대해서는 구원의 약속을 주셨다(7절).  같은 민족인데 왜 하나님이 차별하는가? 이스라엘은 차별한다고 하겠지만 사실상 못하는 사람과 잘하는 사람의 차이를 두는 것이 오히려 의롭고 공평한 것이다. 인간사회에는 어디서나 차별이 있다. 그러나 차별이 크지 않은데 자격지심으로 차별이 큰 것처럼 느끼면 누구도 그 감정을 달래줄 수 없다. 차별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제로 차별이 아니고 오히려 무조건 차이를 두지 않으려는 것이 또 다른 차별이 될 수 있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는 것이 사실상 공평한 것이고 그것이 정의다. < 회복의 때는 온다 >  로루하마를 젖 뗀 후 고멜이 잉태하며 또 아들을 낳았다(8절). 그 아들 이름을 하나님은 ‘로암미’라고 지으라고 했습니다. 암미란 ‘내 백성이다’란 뜻입니다. 역시 이 단어에서도 ‘로’는 영어의 ‘노(No)’를 의미하기에 로암미란 ‘내 백성이 아니다’란 뜻이다. 하나님은 바알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는 내 백성이 아니다.”란 속상한 심정을 담아 그렇게 이름을 붙여주셨다.  ‘로루하마(내가 긍휼히 여기지 않으리라), 로암미(너는 내 백성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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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복을 외면하지 말라 >  한 목회자가 늘 어렵게 살면서 가난을 거룩하게 여겼다. 교인도 대개 비슷하게 생각했다. 한 달 사례비를 최저로 받고 그 적은 사례비로 5명의 자녀를 키우며 극심한 가난 가운데 살았다. 어느 날 한 교인이 안쓰러운 마음을 가지고 목회자에게 거액의 수표를 주며 말했다. “목사님! 이것은 목사님에게 개인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그 돈을 받고 양심이 찔리고 죄책감이 생기고 거룩함이 없어질 것 같아서 말했다. “성도님! 감사해요. 그러나 개인적으로 받기 미안하니까 받은 것으로 치고 교회에 헌금하겠습니다.”  그가 헌금함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때 마음이 떨리고 수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이 돈이 있으면 아이들에게 근사한 식사라도 한번 해줄 수 있고 생활 형편이 조금이라도 풀리는데.” 그런 고민을 하다 헌금함에 그 수표를 넣고 그날 위장병에 걸렸다. 병상에서 그는 깊이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가난이 거룩함의 증거란 고정관념을 깨뜨리며 기도했다. “하나님! 하나님이 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즐겁게 누리는 삶도 배우게 하소서..”  누림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지 말라.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적절하고 지혜롭게 누리는 것도 감사를 아는 삶의 일종이다. 너무 인색하게 살지 말고 편협한 마음을 품지 말라. 가난하게 사는 것을 겸손으로 오해하면서 부정적인 모습으로 겸손을 증명하려고 하지 말라.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삶을 누리지 않고 축복을 외면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다. 축복을 적절하게 누리며 이웃과 나누려는 것이 진짜 겸손이다.  남의 누림에 대해 시기하거나 불편해하거나 뒤에서 험담하지 말라. 누림 중에는 진실하게 흘린 땀의 대가로서 하나님이 축복하심으로 누리게 된 경우도 있다. 그 사실을 외면하고 겉으로 누리는 모습만 보고 시기하면 안 된다. 영화가 끝날 때쯤에는 대개 주인공이 행복하게 잘사는 모습이 나온다. 그때 전반전의 고생하는 모습은 보지 못한 채 역전승을 이룬 후반전의 누리는 장면만 보고 시기하고 불편해하지 말라.

가장 중요한 4가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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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을 예비하는 삶  당시 세례 요한은 인간적인 면에서는 예수님보다 앞선 존재였다. 나이도 6개월 앞섰고 사역도 앞서서 크게 일으켰다. 그래도 예수님을 철저히 높이며 예수님의 길을 개척하고 예비하는 자로서도 앞섰다. 앞선 것으로 인해 교만하지 말고 앞서면 앞선 것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라고 앞선 것이 아니라 은혜를 예비하는 선발대로 앞선 것이란 의식을 가지라. 앞선 자가 되는 꿈을 꿀 때 섬기며 은혜를 예비하려고 앞서라. 내가 앞선 것은 대접받으라고 앞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고 후대의 길을 예비하라고 앞선 것이다.  리더의 가장 소중한 일은 길을 예비하는 일이다. 개척자란 기득권을 가지고 위세부리라고 부름 받은 존재가 아니라 뒤따라오는 갈급한 영혼을 위한 길을 닦으라고 부름 받은 존재다. 살면서 뒤쳐진 자로 머물러 있지 말라.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사명감을 가지고 앞서라. 다만 좋은 길을 예비하고 여는 앞선 자가 되려고 하라. 특히 예수님의 임재와 영광과 나라를 예비하는 자가 되라. 2. 예수님 앞에 겸손한 삶  요한복음 1장 20-27절을 보면 세례 요한의 언행을 통해 겸손을 3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첫째, 겸손은 자기 처지를 아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다(20절). 둘째, 겸손은 자기 사명을 아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다(23절). 셋째 겸손은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 끈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했다(27절). 그는 예수님을 자신보다 앞선 존재라고 했고(29-30절),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했다(33절).  당시 세례 요한은 메시야로 여겨질 정도로 대단한 선지자였지만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지극히 낮추었다. 자신을 최대한 낮추라. 신앙생활을 잘하고 교회를 누구보다 잘 섬겨도 어깨를 으쓱하지 말아야 은혜와 축복이 넘치게 된다. 겸손은 최대의 축복을 담는 그릇이다. 자신을 낮출수

Where to Find Hope 소망이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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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hope does not put us to shame, because God’s love has been poured out into our hearts through the Holy Spirit, who has been given to us.  Romans 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로마서 5:5 Elizabeth struggled for a long time with drug addiction, and when she recovered wanted to help others in return. So she started writing notes and anonymously placing them throughout her city. Elizabeth tucks these notes under car windshield wipers and tacks them on poles in parks. She used to look for signs of hope; now she leaves them for others to find. One of her notes concluded with these words: “Much love. Hope sent.” 엘리자베스는  약물 중독으로 오랫동안 힘들어했는데 회복이 되자 그 보답으로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메모를 써서 익명으로 도시 전역에 배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동차 앞유리 와이퍼 밑에 끼워 넣기도 하고 공원의 기둥에 붙여놓기도 했습니다. 전에는 희망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다녔던 그녀가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희망을 찾을 수 있도록 표지를 남기고 다닙니다. 메모들 중 하나는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희망 드림.” Hope with love—that’s what Jesus gives. He brings us His love with each new day a

말씀을 전적으로 인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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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만을 버리라 >  A가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면서 37살에 장로가 되었다. 그가 맡은 교회학교 부서마다 크게 부흥해서 그는 자신이 설교를 아주 잘한다고 여겼다. 여전도회에서 가끔 헌신예배 때 설교를 부탁해서 1년에 두세 번 설교하면 회원들이 말했다. “장로님 설교가 정말 최고네요.” 그 말이 수고했다는 인사인 줄 모르고 진짜 자기 설교가 최고인 줄 알았다. 결국 자기의 최고 설교로 한국 교회를 뒤집겠다고 신학교에 갔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구약성경을 처음 배울 때 교수가 말했다. “모세오경은 모세가 직접 다 쓴 것이 아닙니다.” A가 깜짝 놀라 따지듯 물었다. “교수님! 그러면 왜 모세오경이라고 합니까?” “학생! 언제 신학교에 들어왔어요?” “금년에 들어왔는데요.” “졸업할 때에도 이해가 안 되면 그때 질문하세요.” 더 이상 설명이 없었다. 그가 나중에 본문 5절에 나오는 모세의 죽음에 관한 말씀을 읽고 적어도 그 부분은 모세의 기록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때 자신이 얼마나 성경을 수박 겉핥기로 알았는지를 깨닫고 회개했다.  교만한 태도를 가지면 미혹되기도 쉽고 편견에 사로잡히기도 쉽다. 어떤 교인은 담임목사 설교를 들으면서 자기도 다 아는 내용이라고 지루하게 여기다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신기한 설교를 들으면 솔깃해져서 말한다. “그 강사 목사님은 성경을 기가 막히게 잘 쪼갠다.” 성경은 쪼개지 말고 통전적이고 유기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성경을 이상하게 잘 쪼개면 진짜 성경을 쪼개는(파괴하는) 행위가 된다.  성경을 잘 쪼개는 이단을 따르면 정상적인 삶이 쪼개지고 가정과 상식이 쪼개지고 교회도 쪼개진다. 성경을 잘 쪼개는 이단은 신학을 인간적인 학문이라고 싫어하고 무시한다. 신학이 자기 멋대로 성경을 쪼개지 못하게 막기 때문이다. 성경은 자기 생각대로 쪼개고 갖다 붙이면 안 된다. 결국 A는 교회에서 맡은 부서를 부흥시키고 책을 조금 봐서 어떤 사실을 알고 일 년에 몇 번 한 설교로 칭찬 받았다고 담임목사를 우습게 알았던 교만한 태

승리가 보장된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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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라 >  사람마다 생각 차이로 오해가 생길 때가 많다. 행복은 환경보다 생각에 좌우된다. 불행한 사람은 어디서도 불행을 찾고 행복한 사람은 어디서도 행복을 찾는다. 행복은 조건이나 환경을 초월해 현실 속에서 얼마든지 누릴 수 있다. 왜 행복을 놓치는가?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과 은혜 속에 살면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깨달음에서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은 무수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자신들의 행복을 잘 깨닫지 못했다. 그에 대한 깨달음을 주려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29절).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는 일은 부모나 목회자나 멘토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다. 필자도 가끔 딸들에게 말한다. “얘야! 아무개 장로님과 권사님과 집사님과 같은 동역후원자들은 아빠 사역에 큰 도움을 주었단다. 그 헌신의 손길을 늘 잊지 마라.” 물론 그들 입장에서는 필자가 전하는 말씀으로 받은 어떤 감동과 은혜가 있었기에 그것을 잊지 못해 헌신의 손길을 펼쳤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 입장에서는 그 헌신의 손길을 통해 사역을 지탱할 힘을 얻었기에 그 은혜를 잊지 못해서 가끔 딸들에게 그 말을 해준다.  어느 날 한 권사가 뒤늦게 예수님을 믿었지만 하나님의 일을 많이 못하고 천국에 간 남편을 추모하며 선교단체에 큰 재정을 기부해 선교센터를 지어드렸다. 그 선교단체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 그 선교관 이름을 그 남편의 이름을 따서 <아무개 선교기념관>이라고 지었다. 무명의 헌신이 아름답지만 그렇게 이름을 밝히는 것도 잘못은 아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사역을 후원했던 루디아나 뵈뵈 등과 같은 신실한 헌신자들의 이름을 성경에까지 기록했다. 그 이름들은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름다운 이름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월새기(월간새벽기도)>는 무명의 헌신자가 사역의 기초를 놓았다. 그 문서에 비록 <아무개 선교기념문서>란 명칭이 붙여지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 이름을 영

모세의 축복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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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는 갓, 단, 납달리, 아셀 지파에 대한 모세의 축복 유언이 나온다. 각각 어떤 축복 유언이 주어졌는가? 1. 갓에 대한 축복 유언  모세는 갓 지파가 광대해지는 축복 유언을 남겼다. 실제로 갓 지파는 요단 동편 길르앗 지역의 넓은 땅을 차지한다. 본문 20절에 있는 “암사자 같이 엎드리고 팔과 정수리를 찢는다.”는 표현은 갓 지파가 용맹스럽게 적을 물리친다는 시적인 표현이다. 가나안 정복 전에 이스라엘이 요단 동편 땅을 정복했을 때 므낫세 반 지파와 르우벤 지파와 더불어 갓 지파가 그 땅을 분배받기를 원해서 모세가 가나안 정복 전쟁의 선봉에 설 것을 약속받고 그 땅을 분배했는데 그 약속을 잘 이행할 것이란 축복 예언도 남겼다(21절).  갓 지파는 유다 지파처럼 어려운 일에 선봉에 설 줄 아는 지파였다. 선봉에 서면 어려움을 더 겪지만 그만큼 축복의 크기도 커진다. 좋은 일에 앞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인물의 길을 앞서서 닦고 나아가면 뒤에서 판단하고 질투하는 사람도 반드시 생긴다. 남이 뒤에서 나를 발길질하는 것은 내가 앞서서 뛰면서 세상을 다르게 만들고 있다는 뜻도 된다. 마라톤 중계에서 대개 1등과 선두그룹을 주목해 중계한다. 비판이 있어도 선두 그룹에서 이탈하지 말라.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앞서 행함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선봉장이 되라. 2. 단에 대한 축복 유언  모세는 단을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의 새끼‘로 비유했다(22절). 그처럼 용맹했지만 우상숭배에 빠져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 방랑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엄밀히 말하면 단 지파에 대한 예언은 축복 예언이 아니다. 왜 단 지파의 결말이 나쁘게 되었는가? 힘들다고 주어진 자리를 버렸기 때문이다. 힘들어도 믿음의 길에서 후퇴하지 말라. 사람이 늘 형통할 수는 없고 걱정거리가 수시로 생긴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견고하고 끈질긴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조금 어렵다고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에 의문을 품어 믿음의 길에서 후퇴하지 말라.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에

남은 자가 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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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한 둑 역할을 하라 >  2년 전 중국이 사드(Thad,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 문제로 우리나라에 경제 보복 조치를 가했다. 사드 레이더가 중국 본토 일부를 탐지해 중국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주장했지만 일본에 배치된 미국 레이더가 이미 중국 본토 일부를 탐지하고 있었기에 그것은 변명이었다. 중국의 무례와 보복으로 우리 감정도 크게 상했다. 어떤 사람은 중국과 단교하자고 하고 약하게 나오는 우리 리더십에게 “왜 중국 앞에서 저자세냐? 왜 단호히 중국 사업을 철수시키지 않느냐?”고 질책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 국민이 치를 희생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중국이 왜 사드 문제로 시비를 거는가? 사드 문제 전만 해도 한중관계는 꽤 좋았다. 우리는 중국과의 무역으로 막대한 흑자를 얻고 있었다. 2010년부터 2016년까지 7년간 3700억 달러의 천문학적인 흑자를 보았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고객으로서 겉으로는 태연해도 자존심도 크게 상하고 속도 쓰렸을 것이다. 게다가 제품의 중간재 수입이 많으니까 경제적으로 한국에 예속된 느낌도 들었을 것이다.  중국의 경제 성장률이 높고 관계가 좋을 때는 쓰린 속을 참을 만 했지만 점차 성장률이 둔화되니까 막대한 무역 역조로 인한 본전 생각도 났을 것이다. 관계가 좋을 때는 무역 역조가 자기네 경제 성장에도 필요하고 우호관계를 위한 지불금으로도 생각할 수 있지만 자기와 꽤 친한 줄 알았던 한국이 사드 문제로 군사적으로 미국과 밀착되는 것 같으니까 자존심의 감정선이 자극되어 이렇게 느꼈을 것이다. “돈은 우리로부터 왕창 벌어가면서 미국과 더 친하네.” 그런 감정이 사드 보복을 통한 우월적인 지위 과시로 나타났다.  우월감을 과시하는 무례한 태도는 대개 열등감의 산물이다. 왜 중국이 열등적인 우월감을 지나치게 표출하는가? 한류가 큰 이유였다. 사드 보복 전까지 우리의 드라마와 노래 등은 중국인의 대중을 크게 사로잡았다. 유력한 정치인들의 부인까지 우리 드라마의 광팬이 되니까 문화적으로 작은 나라에 예속

내 등 뒤에 계신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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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등 뒤에 계신 주님 >  예수님의 조반 먹으라는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마음에 안도감과 함께 확신이 생겼을 것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인 줄 알고 “당신은 누구세요? 주님처럼 변장한 분 아니세요? 혹시 주님이 영으로 오신 것은 아니세요? 정말 부활하신 주님이세요?”라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성도가 가끔 낙심과 회의에 빠지는 이유는 주님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을 알게 되면 문제의 의미도 알게 되면서 해결책도 알게 되고 앞날에 대한 확신도 가지게 된다.  가끔 큰 문제를 만나 길이 안 보이는 것 같을 때 문제에 빠지지 말고 주님을 더 알려고 하라. 주님을 알면 알수록 문제의 의미도 잘 알게 되고 문제해결의 길도 잘 보이게 된다. 주님을 알면 내 병과 가난의 의미 및 내 문제와 상처의 의미도 알게 된다. 주님을 아는 것이 성공비결이다. 주님을 알면 패배의식으로 가득 찬 제자도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룰 수 있다. 주님을 알기에 힘쓰라. 하나님이 머리를 주신 이유는 주님을 더 알기를 힘쓰라는 뜻이다.  무엇보다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이다. 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쌍둥이도 다르고 아침 해와 저녁 해도 다르지만 주님의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없다. 주님은 충성하고 헌신할 때만 사랑하지 않는다. 내가 배반하고 실패해도 사랑하고 죄에 빠져 못난 모습을 보여도 사랑한다. 그 사랑을 확신하고 그 사랑을 배경으로 내일의 지평을 담대히 열어 가라. 하나님이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시면 겁낼 것 없다.  어떤 고난이 와도 담대하라. 내 뒤에 계신 하나님은 나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리 부족해도 나를 붙들어주신다. 사람은 포기할 수 있다. 남편이 매번 술 먹고 집에 와서 물건 내던지면 좋은 아내도 포기한다. 사람이 변화된다는 것은 힘들다. 목사도 포기한 사람을 ‘목포댁’이라고 부른다. 그런 목포댁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가치 없게 보여도 하나님은 가치 있게 보신다. ‘하나님 안

리더십보다 마더십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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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서가 없으면 사랑도 없다 >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요란한 큰 소리는 없어도 조용한 중에 곳곳에 펼쳐진 주님의 사랑의 그물은 빈틈이 없다. 주님의 어느 행동, 어느 말씀을 봐도 제자들을 향한 따뜻한 사랑이 읽힌다. 베드로가 어색한 상황을 모면하려고 딴청하며 잡은 고기를 다 세자 큰 고기가 153마리였다. 그 일이 끝나자 더 이상 딴청 부릴 것이 없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베드로가 고기를 셀 때 숯불에서 불을 쬐거나 옷을 말리는 척 했을지 모른다. 그런 어색한 상황에서 주님이 말씀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얼마나 다정다감하신 말씀인가? 그 한 마디 말씀에는 제자들을 향한 사랑과 용서와 위로가 다 들어 있었다. 경상도 말로 하면 “밥 묵자.”라는 말인데 그 무뚝뚝한 말에는 “너를 사랑한다. 너를 용납한다.”는 뜻이 있다. 함께 하는 식사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그런 식사가 없으면 인간관계도 잘 깊어지지 않는다. 식사를 함께 하는 것에는 “당신과 친하고 싶다. 당신을 좋아한다. 당신을 용납한다.”는 뜻이 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 먹어.”라고 하신 것은 “너희를 여전히 사랑한다. 너희 잘못을 다 용서했다.”는 뜻이다. 용서를 실천하라. 정의와 공평에 대한 신념이 투철한 사람은 대개 용서를 잘 못한다. 용서 자체가 너무 불공평하기 때문이다. 용서는 원래 사리에 맞지 않다. 사리를 따지면 용서할 수 없다. 용서는 이해도 아니다.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은 진짜 용서가 아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을 용납하고 큰 어려움과 실망을 시킨 사람도 용납하고 사랑하는 것이 용서다. 예수님은 그렇게 용서하셨다.  용서를 절대 못하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고갈되고 은혜의 연료가 바닥났다는 증거다.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금 은혜가 없다는 말도 되고 앞으로 받을 은혜가 없다는 말도 된다. 불행한 일이다. 용서하지 않으면 불행의 열매가 고스란히 내게 돌아온다. 용서는 본능적으로 힘들지만 하나님의 큰 용서를

축복을 잘 간직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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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울 줄 알아야 키워진다 >  드디어 베드로가 고기를 다 세었다. 다 세어보니 그물에 가득히 찬 큰 고기만 일백 쉰 세 마리였다. ‘153마리의 큰 고기’는 하나님의 큰 축복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축복주시기를 원하신다. 성경은 우리가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넘치게 주신다고 했다(엡 3:20).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지도록 깨끗하고 빈 그릇으로 만드는 일이다. 말씀과 기도가 없으면 자꾸만 자기 안에 자기가 채워지기에 말씀과 기도로 계속 자신을 비워가야 한다.  은혜가 넘치면 날이 갈수록 “내가 작구나!”하고 느낀다. 과거에는 내가 노력하면 세상과 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자신만이라도 바꾸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왜소한 생각 같지만 자신을 작게 볼 때 오히려 하나님의 풍성함이 마음에 차오르게 된다. 자신을 키우려는 삶은 불안을 부르고 자신을 비우려는 삶은 평안을 부른다. 불행의 이유는 ‘능력과 지위와 배경과 소유의 부족’에 있지 않고 ‘자기를 비우는 삶의 부족’에 있다. 행복은 ‘자기 비우기’에 탁월한 사람의 것이다.  자기를 비울 때 자기가 키워진다. 자기를 잘 비우는 삶에는 감사와 감동과 감격이 넘친다. 오늘날 가장 그리운 친구는 ‘자기를 높여 무한 경쟁 시대에 앞선 친구’보다 ‘자기를 비워 나눔의 시대를 열어 가는 친구’다. 한 성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할 때 “그들이 나를 잘 아네.” 하고 반응했다. 자기의 부족을 알고 하나님을 자신의 전부로 알면 하나님은 그의 인생 그물에 소중하고 풍성한 것들을 가득 채워주실 것이다. < 축복을 잘 간직하는 방법 >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받은 축복을 잘 간직하는 것이다. 본문을 보면 그물에 고기가 가득히 찼어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그물이 찢어져버리면 고기를 천 마리 잡아도 남는 것이 없다. 고기를 얻는 것도 축복이지만 그물이 찢어지지 않는 것도 축복이다. 아무리 죽도록 돈을 벌어도 그물이 찢어지면 터진 웅덩이에

은혜를 받는 3대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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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절제하는 자세  홍수 후에 노아가 농사를 시작해 포도나무를 심은 후 거기서 얻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다(20-21절). 그 모습은 당대의 의인 모습이 아니다. 그가 홍수 후에 갑자기 타락했는가? 아니다. 사람의 모습이 원래 그렇다. 노아도 상대적 의미에서 의인일 뿐 역시 죄인이다. 의인이란 ‘행위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다. 노아가 술을 먹은 것이 죄인가? 죄라는 주장도 있고 죄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또한 술을 먹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취하도록 먹으면 죄라는 주장도 있다.  엄밀히 말해 포도주를 먹는 것이 꼭 죄는 아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포도주의 유익을 말한다. 사사기 9장 13절에는 포도주가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한다고 했고 시편 104편 15절에는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를 주셨다고 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해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했고(딤전 5:23), 창세기 27장 28절에는 포도주가 축복의 상징으로 언급되었다.  잠언 9장 5-6절에는 포도주가 생명과 명철을 준다고 했고 이사야 25장 6절에는 하나님이 마련한 연회에서 오래 저장한 맑은 포도주를 베푸신다고 했다. 예수님은 성찬식 때 포도주를 사용했고 마태복음 26장 29절에는 장래에 하나님 나라에서 성도가 주님과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신다는 말씀이 있다. 요한복음 2장에는 예수님이 첫 기적으로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고 예수님의 별명이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마 11:19)’이었던 것을 보면 실제로 예수님도 포도주를 즐기셨던 것으로 추정된다.  구약시대에는 하라는 율법 365개와 하지 말라는 율법 248개를 합해 총 613개의 율법이 있었다. 그 수많은 율법 중 술을 정죄하는 율법은 하나도 없었다. 술 취해 싸우고 욕하고 폭행하고 큰소리치고 주정부리는 2차 죄가 없다면 술 먹는 것 자체를 무조건 정죄하는 것은 성경과 주님이 인정하지 않은 속박의 멍에를 지우는 것이 된다

사랑의 3대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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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하자 베드로는 곧 그물을 육지로 끌어올렸다. 그물에 잡힌 큰 고기는 153마리였다. 그물에 가득한 물고기를 어부들이 한 마리 한 마리 자세히 세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면 누가 고기를 153마리라고 정확히 세었고 성경은 왜 굳이 153마리를 기록했는가? 그 숫자는 당시 상황과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누가 고기를 세었는가? 아마 베드로가 세었을 것이다. 왜 베드로가 고기를 세었는가?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 때문에 주님의 얼굴을 볼 낯이 없었다. 그렇다고 먼 산을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 어색한 상황을 모면하려 베드로는 마음은 주님에게 가 있으면서도 딴청을 피우며 고기를 하나씩 셌다. “하나, 둘, 셋.... 백 하나, 백 둘, 백 셋....” 그 모습을 주님은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셨다. 그 장면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사랑이 무엇인가? 1.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다  주님은 베드로가 딴청 피우는 모습 속에서 주님을 향한 열망을 읽고 그 마음을 이해하셨다.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다. 부부가 어려움을 겪는 가장 큰 이유도 이해심 부족 때문이다. 이해심이 없으면 사납게 되고 이해하면 부드럽게 된다. 어떤 남편은 남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아내에게만 한없이 강하다. 아내가 한 마디 하면 “쥐뿔도 모르면서 그래.”라고 윽박지른다. 세상이 바뀐 줄 모르고 그러니까 요새 황혼 이혼이 늘고 있다. 사람이기에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해 이해하라. 이해심이 없으면 나중에는 돌이키기 힘든 상황이 생긴다.  어느 날 시골의 한 천주교회에서 미사 때 신부를 돕던 소년이 실수로 성찬용 포도주 그릇을 떨어뜨렸다. 그때 신부가 소년의 뺨을 때리며 버럭 소리쳤다. “넌 하나님께 큰 죄를 졌다. 다시는 제단에 나타나지 마.” 그 후 소년은 평생 교회를 멀리했고 공산주의에 심취했다. 그가 유고 대통령을 지냈던 티토다. 반대로 한 신부는 똑같은 상황에서 떠는 소년을 위로했다. “얘야! 괜찮다. 하나님도 이해해주실 거야.

천국을 내면에서 이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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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신을 원하시는 주님 >  본문에서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는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이미 숯불 위에 생선을 굽고 계셨다. 그래도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줄 생선을 다 준비해 구워 놓지 않았다는 말도 된다. 여기서 나의 동역을 원하는 주님의 뜻을 찾게 된다.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준비할 수 있지만 내 것을 받으시고 그것을 통해 일을 이루기를 기뻐하신다. 벳새다 광야에서 주님은 친히 오천 명을 먹일 수 있지만 어린아이의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받으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다.  주님은 고기를 받고 더 좋은 구운 고기로 되돌려 주시려고 고기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그처럼 주님은 더 큰 축복을 주려고 내 것을 내어드리기를 원하신다. 헌신이 없는 부, 쓰임 받지 못하는 축복은 오히려 진노의 제목이다. 드림이 없는 삶엔 과시는 있어도 보람은 없다. 모험이 없는 성공이 없고 투자가 없는 이익이 없듯이 영적 세계에서도 드림이 없는 은혜와 축복은 없다.  요새 많은 가정이 붕괴되는 가장 큰 이유는 헌신이 없기 때문이다. 요새는 결혼식 때 연주되는 결혼행진곡이 “행복의 문 열려라!”로 들리지 않고 “고생의 문 열렸네!”라고 들려진다. 실제로 믿음과 헌신이 없으면 고생문이 활짝 열리는 것이 결혼생활이다. 왜 어떤 사람은 돈도 많고 행복의 조건이 많은데 불행한가?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고 헌신에 있기 때문이다. 헌신이 없으면 축복도 없고 행복도 없다. 사람은 헌신해야 행복할 수 있다. 헌신해야 사람도 얻고 행복도 얻고 성공도 얻는다.  공허감은 헌신하라는 하나님의 싸인(sign)이다. 나로부터 나가는 것이 없으면 내 안에 꽉 차는 느낌이 없다. 외로움도 헌신하라는 싸인이다. 헌신해야 참된 친구도 생긴다. 행복과 축복은 멀리 있지 않다. “나는 행복의 조건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행복의 조건은 내 안에 있고 내 태도 속에 있다. 내 안에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행복의 심지를 다듬는 것이 행복의 조

위로하시고 용서하시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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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하시는 주님 >  “주님이시다.”란 요한의 외침을 듣고 베드로는 헤엄쳐 누구보다 먼저 주님께 왔지만 바닷가에 놓인 숯불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얼마 전 숯불 앞에서 주님을 세 번 부인한 기억 때문이었다. 베드로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있자 다른 제자들도 덩달아 아무 말도 못했다. 그 침묵을 깨고 예수님이 말씀했다.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그때 “왜 기다리지 못하고 사명을 저버렸어?”라는 책망을 예상했는데 너무 따뜻한 말씀이었다.  주님이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하신 것은 제자들을 위로하려는 주님의 간접적인 위로 방법이었다. 위로할 때 위로하는 말보다 간접적인 위로가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 초상집에 가서 “삼가 심히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라는 것보다 상주의 손을 한번 꽉 쥐어주는 것이 더 큰 위로가 된다.  주님은 ‘생선 얘기’로 제자들을 위로하기를 원하셨다. 그때 제자들은 아무 것도 주님께 내세울 게 없었다.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그 마음도 자기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제자들이 가진 것은 그물에 가득 찬 고기뿐이었다. 그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생선 얘기’를 통해 제자들이 “우리가 아직 주님께 드릴 게 있구나.” 하는 마음을 가지게 해 그들의 자존감을 세워주셨다.  받을 생각만 하면 삶이 공허하지만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묘한 힘이 솟는다. “주님이 나를 필요로 하시고 나의 동역을 원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면 힘이 난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맡기신다. 주님의 사명을 외면할수록 공허감과 불안과 우울은 커지지만 주님의 사명에 헌신할수록 만족과 평안과 기쁨이 커진다.  어느 날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 얼굴이 어두웠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겠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현명한 부모는 “너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 말해 봐!”하고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다. 만약 아이 입

주님의 사랑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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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패 앞에서 정직하라 >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를 내서 교도소에 갔는데 잘못이 있어 들어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거의 대부분 자기 잘못보다는 더럽게 재수 없어 들어왔다고 했다. 자기 죄와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마음의 천국은 이뤄질 수 없다. 천국에는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용서해주세요.”라고 하는 사람만 있고 지옥은 “하나님! 저는 죄가 하나도 없어요.”라고 하는 사람만 있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죄와 실수와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면 신앙도 없고 진실도 없고 감격도 없고 마음의 천국도 없다.  은혜를 받으려면 실패 앞에서 정직하라. 정직이 없으면 치유도 없다. 회개란 자신의 죄와 실패에 대해 정직하고 “나는 예수님이 없으면 길이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죄와 실패에 대해 정직하면 몸과 마음과 영혼에 급속한 치유가 일어난다. 상처 없는 사람은 없고 상처를 피하는 길도 없다. 반대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도 없다. 어떤 상처도 예수님 안에서는 치유된다. 그것을 위해 가장 필요한 전제조건이 실패 앞에서 정직한 것이다.  자기 실패의 현장에 솔직하게 서서 그 실패의 상처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덮어가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상처 치유의 무대를 만들어 그 영혼을 치유하고 건강한 마음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하셨다.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살면 크게 일할 수도 없고 건강도 훼손된다. 말기 암 환자를 보면 많은 경우에 그가 약 2-3년 전 쯤 마음의 큰 충격을 받은 사례가 많다고 한다.  베드로도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의 숯불 현장이 없었더라면 그는 폐인이 되었든지, 만성 위경련에 시달렸든지, 죄책감 때문에 소심하게 되어 떳떳하게 고개도 들지 못하고 지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다가 숯불만 보면 깜짝 놀라고 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하며 전혀 수제자 역할을 못했을 것이다. 남들이 자신을 보고 “저분은 예수님의 수제자야.”라고 해도 베드로 자신은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수제자야.”라고 스스로 비하했을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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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원리대로 표현하라 >  ~  거짓말도 주의해야 하지만 거짓 증거는 더 주의해야 한다. 특히 인터넷을 통해 남의 사생활에 대해 실제 상황과 맥락도 모르면서 마치 확신하듯이 뒤에서 익명으로 개인의 인격을 난도질하는 것은 교만하고 비겁한 모습이다. 인터넷 댓글은 깨우침을 주는 지식의 보고도 되지만 인격을 살해하는 흉기도 될 수 있다. 악성 댓글은 ‘자유로운 의사 표현’이 아니라 ‘악의적인 거짓 증언’이다. 나의 인터넷 댓글도 내 입에서 나오는 말처럼 여기고 성경 원리대로 표현하려는 태도가 지혜롭고 복된 태도다. < 지혜로운 사람 >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믿음의 기초 위에 지혜로운 삶도 더해야 한다. 믿음은 있는데 절제, 이웃 사랑, 복된 언어, 겸손이 없다면 그 믿음은 빛을 잃는다. 믿음과 지혜로운 삶은 관련이 깊다. 믿음을 가진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1. 땀 흘려 세우는 사람  본문 1절에서 ‘지혜로운 여인’은 지혜를 의인화한 것이다. 지혜란 자기 집을 세우고 미련함이란 자기 집을 허무는 것이다. 집을 세운다는 말은 가족을 세워준다는 뜻도 포함한다. 가족은 서로 섬겨주고 인정해주고 서로의 아픔을 감싸주며 하나님 외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야 하는 존재다. 가족이 내 사랑을 먹고 배부르게 하라. 남에게 예의를 지키고 잘하는 것 이상으로 가족에게 잘해주면 얼마나 행복한 가정이 되겠는가?  집을 세울 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땀이다. 땀을 흘릴 줄 알아야 많은 것을 얻는다. 본문 4절을 보라.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소가 있으면 구유가 냄새나고 더러워져도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까 소가 있는 것이 낫다는 암시다. 너무 깨끗한 것만 좋아하지 말라. 냄새나는 일이나 환경도 거부하지 말라. 해야 할 일이라면 더럽고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아야 복을 받는다.  또한 일할 때 힘들다고 도중에 포기하지 말라. 살을 뺄 결심을 했으면 계속 운동하면서

실패의 현장에 다시 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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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이가 나쁜 것이 아니다 >  성격 차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서로 이해하고 참아주면 성격 차이가 오히려 축복의 재료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다르게 창조하셨다. 성격이 똑같으면 오히려 재미없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의견과 생각이 다른 것이 당연하고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 중요한 것은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다른 것을 소중히 생각하고 서로 믿고 이해하고 인내하고 섬겨줌으로 하나가 되려는 자세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많이 달랐다. 제자들이 기적적으로 고기를 잡은 후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발견하고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라고 외치자 베드로는 즉시 겉옷을 두른 후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때 다른 제자들은 어떻게 했는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왔다. 오십 칸은 약 90미터쯤 된다. 즉 예수님이 계신 곳과 제자들이 탄 배 사이의 거리가 약 90미터 정도인데 그 거리를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왔다는 말이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얼마나 다른가? 예수님께 베드로는 즉각 바다로 뛰어내려 헤엄쳐 왔지만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끌고 왔다. 그 장면에서 즉시 바다로 뛰어내린 베드로의 행동이 주목을 끌지만 그렇다고 다른 제자들은 틀린 것은 아니다.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처럼 다 뛰어내리면 배와 잡은 고기는 어떻게 하는가? 베드로처럼 바다로 뛰어내려 주님께 오는 제자도 필요하고 배와 잡은 고기를 챙기고 주님께 오는 제자도 필요하다. 공동체에는 비전을 세우고 힘차게 앞서 나가는 사람도 필요하고 반면에 뒤를 잘 챙기고 살피며 따라가는 사람도 필요하다.  자연을 보면 각 사물마다 자기의 색깔이 있기에 오히려 더 아름답게 보이듯이 서로의 차이와 필요를 인정하면 그 공동체는 더욱 복된 공동체가 된다. 자기만 옳지 않다. 남도 그의 입장에서는 옳을 수 있다. 남을 나처럼 만들려고 하지 말라. 자녀도 내 맘대로 못하는데 남을 나처럼 어떻게 만드는가? 오히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