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019의 게시물 표시

멀찍이 뒤따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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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누가복음 22장 54-60절 54.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55.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57.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58.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9.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 자만심에 빠지지 말라 >  예수님이 잡히시자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가장 열렬하게 따랐던 베드로도 3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한다.”고 했는데 그대로 되었다.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인간의 연약성을 새삼 깨닫는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때는 예수님을 부인한 실패자가 되었다. 무엇이 그를 실패하게 만들었는가? 자만심 때문이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는 다 배반해도 자기는 결코 배반하지 않는다고 했다(막 14:30-31). 가끔 보면 “나만은 결코 배반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배반하고 “나는 이곳에 뼈를 묻겠다.”는 사람이 어느 날 훌쩍 떠난다. 자만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충성도 하나님이 충성하게 도와주셔야 된다는 사람이 대개 변함없이 충성한다. 어떤 경우에도 자만하지 말고 남의 외적인 허물을 바라보고 판단하기 전에 나의 내적인 어둠부터 성찰할 줄 알라.  가끔 하늘을 보면 인간의 미소함을 절감한다. 해변에서 수평선만 바라봐도 인간의 성공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뼈저리게 느낀다. 사람의 시야가 얼마나 작고 사람의 지식도 얼마나 작은가? 수평선

하나님의 4가지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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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요한복음 17장 9-13절 9.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11.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3.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1. 하나님이 영광 받는 것  하나님은 성도로부터 영광 받기를 원하신다(9-10절). 삶의 제일 목적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에 두라.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 돌리는가? 물질만으로는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없다. 하나님은 거대한 성전 안에 거하시지 않는다. 성전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감동시키려는 태도는 세월의 흐름을 막지 못해 결국 쇠퇴하는 종교를 낳는다. 하나님은 외면보다 내면을 통해 영광 받으신다.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말로가 비참해진다. 성경에 가끔 나오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라.”는 말씀은 궁극적인 승리의 원천이 되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라. 전능하신 사랑의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 기도할 때도 “내가 여호와인 줄 알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생생하게 들으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 가장 복된 삶이 펼쳐진다. 2. 제자들이 하나 되는 것  하나님은 성도가 하나 되기를 원하신다(11절). 몸의 회복과 환경의 회복은 마음의 회복에서 비롯되고 마음

약속 되었어도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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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요한복음 17장 1-5절 1.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라 >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려는 예수님의 열망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런 열망을 가지라. 내 모습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내 기도도 능력 있는 기도가 된다. 자녀가 잘되기를 원하면 하나님을 높이도록 가르치라. 왜 감사가 중요한가? 그것은 하나님을 높이는 최선의 모습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연약하고 실수가 많아도 범사에 감사하면 신비하게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  성경을 보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그래도 괜찮다. 하나님은 스마트하기에 축복하시지 않는다. 대단한 자질이 있어야 축복받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면 하나님이 풍성한 축복을 허락하신다. 매일 하루의 첫 시간에 감사기도를 드리라. 아침마다 하나님을 높이며 기도하라. “하나님 오늘도 제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길 원합니다.”  하나님을 높이면 내 꿈을 초월한 엄청난 축복의 자리로 이끌린다. 나의 축복은 내가 똑똑하고 능력이 있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려고 노력하기에 주어진 것이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도 결국 하나님을 높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명예롭게 하는 일을 습관화시키라. 피곤하

폭넓은 이해를 훈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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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요한복음 16장 16-19절 16.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17.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18.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라 >  성령님은 인격적인 안내자다. 어떤 사람은 성경 말씀에만 집착해서 성령님의 직접적인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음성이 있음을 외면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겸손하고 순종적인 성도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통한 인격적이고 실제적인 인도가 있다.”고 말씀한다. 문제는 “사랑의 하나님이 왜 사랑하는 성도를 고난의 길로 인도하시는가?” 하는 문제다. 그러나 고난은 최종 결과가 아니다. 영화를 중간까지만 보고 속단하지 말라. 삶은 진행형이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고난을 삶의 열정을 타오르게 하는 도구와 통로로 만들라.  필자는 가끔 예배를 인도할 때 준비한 말씀이 잘 전달되지 않고 막힌다. 그때는 괴롭고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에게 미안하다. 그러나 곧 마음속에 열정이 새롭게 타오르며 이렇게 각오한다. “너무 실망하지 말자. 다음에는 더 기도하고 더 말씀을 잘 준비하자.” 그런 재헌신과 재다짐을 위해서도 가끔 고난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때로 고난을 통해 최종적인 선의 길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를 긍정하라. 성경에는 하나님의 인도와 관련된 수많은 말씀이 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려면 자아를 포기하라. 사람이 가끔 저지르는 실수가 때로는 인생의 좋은 교훈이 된다. 그래도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참된 음성과 거짓 음성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 지혜를 얻기 위해

엄중한 심판을 면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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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누가복음 20장 45-47절 45.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1. 긴 옷을 입고 다니지 말라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약속을 지키는 실력이 진짜 능력이다. 못 지킬 말을 해도 안 되지만 안 지킬 말을 하면 더 안 된다. 말에 사람됨이 다 나타난다. 약속했으면 힘써 지키는 것이 인격의 기본이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했으면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자신은 종으로 살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 약속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삶의 증거가 있어야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도 면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는 삶을 도전하면서 서기관의 예를 들어 가장 먼저 “긴 옷을 입고 다니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은 “겸손하라.”는 말씀이다. 당시 대부분 바리새인이었던 서기관들은 권위를 과시하려고 긴 옷을 입고 다녔다. 목사는 강단에서 긴 옷을 입고 판사는 재판정에서 긴 옷을 입는다. 그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긴 옷 속에 교만과 우월감이 감춰져 있으면 안 된다. 최근에 많은 목사들은 탈 권위의 상징으로 특별한 의식이 없으면 예배 때 그냥 양복을 입는다. 그런 권위도 없애겠다고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기도 하지만 지나침은 모자람만도 못할 수 있다.  만약 목회자가 교회 밖에서 예복을 입고 돌아다니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높은 마음을 가지고 정신적인 갑질을 하면 존경스럽게 보이기보다 오히려 경망스럽게 보인다. 요즘은 을을 무서워해야 하는 시대다. 옛날에는 갑의 갑질을 반격할 힘이 을에게 거의 없었지만 인터넷 세상에서는 을에게도 반격 무기가 꽤 많다. 갑의 위치에 있어도 겸손을 잃지 말라. 을의 반격도 무섭지만 더욱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반격이다. 2. 문안 받기를 좋아하지

하나님을 찾아 의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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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호세아 10장 12절 12.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  어느 날 A 목사가 결혼식 주례 때 주례사만 55분을 했다. 신부는 현기증으로 쓰러질 뻔했다. 주례 내용도 결혼과는 상관이 없는 영혼구원에 관한 설교였다. 불신자 하객들을 전도하려는 열정으로 주례설교를 55분이나 한 것은 신랑신부가 아닌 자신을 주인공으로 삼는 것이고 영혼구원의 열정으로 포장된 자기도취다. 열정과 도취는 다른 것이다.  어떤 B 부흥사는 주일설교를 보통 1시간 이상 한다. 부흥회 설교는 3시간 넘게 하기도 한다. 그는 설교할 때 두서도 없이 웃기는 얘기를 나열한 설교로 끊임없이 웃긴다. 설교자가 많이 웃기면 설교 내용의 바름과 적절함과 어투와 자세 등은 상관없이 교인들은 대개 은혜를 받았다고 여기고 멀리서 교회를 찾아와 등록했지만 그 밑에서 사역자는 물론 교인도 오래 붙어있지 못했다.  교회를 떠날 때는 대부분 욕하고 떠났다. 왜 떠나느냐고 물으면 하나같이 “독선이 심해요. 설교가 말빨인가요?”라고 했다. 사람을 웃기는 설교를 3시간 넘게 즉석에서 하기에 처음에는 ‘말씀의 종’인 줄 알다가 똑같은 예화로 웃기는 얘기를 1년에 5번 이상도 하는 것을 보고 ‘3시간 즉석설교’를 ‘영혼구원의 열정’이 아닌 ‘자기도취의 산물’로 보면서 교인들이 하나둘 떠난 것이다.  초임 전도사들은 그 부흥사가 즉석설교를 3-4시간 하면서 청중들을 웃기는 모습을 보고 꿈을 품는다. “나도 저분처럼 설교를 잘하고 싶다.” 그러나 설교를 오래 하다 보면 설교 준비가 부족할수록 설교가 길어지고 늘어지는 것을 알게 되면서 ‘3시간의 즉석설교’를 본받고 싶다는 생각은 거의 사라진다. 성도들도 신앙생활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즉석에서 나오는 화려한 부흥회 설교보다 자기 담임목사의 기도흔적이 배인 소박한 설교가 훨씬 진실한

인물 성도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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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호세아 9장 10-15절 10.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11.에브라임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 가리니 해산하는 것이나 아이 배는 것이나 임신하는 것이 없으리라 12.혹 그들이 자식을 기를지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떠나는 때에는 그들에게 화가 미치리로다 13.내가 보건대 에브라임은 아름다운 곳에 심긴 두로와 같으나 그 자식들을 살인하는 자에게로 끌어내리로다 14.여호와여 그들에게 주소서 무엇을 주시려 하나이까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젖 없는 유방을 주시옵소서 15.그들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므로 내가 거기에서 그들을 미워하였노라 그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내 집에서 그들을 쫓아내고 다시는 사랑하지 아니하리라 그들의 지도자들은 다 반역한 자니라 < 하나님만 섬기라 >  본문 10절에 언급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다.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다.”는 표현은 이스라엘이 한때 하나님께 큰 기쁨이었다는 암시다. 그들이 바알브올 지역에 가서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우상처럼 가증하게 되어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가 되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에서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잘라버리신다고 했다(요15:2). 열매 맺는 삶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의 기쁨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사랑이 없는 모습 같지만 잘라내야 할 것은 잘라내야 공동체 나무가 건강해진다. 교회에서 악인이나 이단의 출교도 최대한의 신중함을 바탕으로 필요하면 실행해야 한다. 무엇보다 자기의 악한 습관이나 잘못된 생각을 내버리고 방만한 삶의 형태도 잘라내야 한다. 방만하게 살면 창조성도 약화되고 정신력도 무뎌지고 신앙

거룩한 양심을 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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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 호세아 9장 7-8절 7.형벌의 날이 이르렀고 보응의 날이 온 것을 이스라엘이 알지라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나니 이는 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큼이니라 8.에브라임은 나의 하나님과 함께 한 파수꾼이며 선지자는 모든 길에 친 새 잡는 자의 그물과 같고 그의 하나님의 전에는 원한이 있도다 < 거룩한 양심을 가지라 >  본문 7절에 나오는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다.”는 표현은 어리석고 극단적인 거짓 선지자가 백성들을 호도해서 하나님의 진노로 형벌과 보응의 날이 임했음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거짓 선지자와 이단 교주에게 미혹되지 않으려면 말씀의 분별력과 거룩한 상식과 양심이 필요하다. 기적과 신비한 현상에 너무 이끌리지 말라. 마지막 때 거짓 선지자들이 기적을 행해 사람들을 미혹한다(계 13:14). 예수님은 제자의 표식이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셨다(요 13:35).  거짓 선지자와 이단 교주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면서 최소한의 양심도 없다. 사람은 자기 치부를 감추려고 크고 작은 거짓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가 봐도 뻔한 거짓말을 공개적으로 하면서 진리의 종이라고 하고 미래를 안다고 하고 복과 기적을 준다고 하면 그 말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단 교주는 대개 신자에게도 거짓말을 하도록 사주한다. 그러면 바로 그 단체를 떠나야 하는데 계속 거기에 있으면서 “진리를 위해서는 거짓말도 필요해.”라고 하는 것은 자신도 이단 교주처럼 최소한의 양심마저 잃어가도 있는 증거다.  영생의 비밀을 안다면서 사기 행각을 치는 어떤 사람은 돈이 궁하니까 자기 추종자에게 대부업체에 돈을 빌리게 하고 갚지 않은 채 도망 다니고 핸드폰 개통을 위해 남의 주민등록에 거짓으로 전입신고를 하게 했다. 그런 사람을 보면 영적인 망상 제비족인 줄 알고 바로 멀리해야 하는데 그런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큰 문제다. 결국 이단 교주처럼 이단 신자도

쓰임 받는 그릇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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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임 받는 그릇이 되라 >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카산드라는 트로이의 마지막 왕 프리아모스와 헤카베 사이에서 태어난 미모의 여인이다. 아폴론 신이 그녀에게 반해 예언의 능력을 주며 청혼하지만 그녀는 거절한다. 상처 받은 아폴론은 마지막 입맞춤을 요청해서 그 입맞춤을 통해 그녀의 설득 능력을 빼앗았다. 결국 그녀는 미래를 알고 예언해도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결국 비참하게 죽는다. 그녀는 ‘힘없는 예언자’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심판 예언도 많은 백성들에게 무시당했다. 백성들은 희망을 주는 예언만 선호했기 때문이다. 당시 무지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비웃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생 그릇을 빚는 토기장이시다. 토기장이는 좋은 흙을 체로 거르고 물을 뿌려 질흙으로 만들고 그것을 물레 위에 올려놓고 세심하게 질흙으로 토기를 빚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기 주권대로 흙을 뭉개 다른 그릇을 빚는다.  하나님은 개인의 삶도 이끌지만 역사도 이끄신다. 역사의 흐름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갑자기 급격히 달라질 때가 있다. 그때가 하나님의 때인 ‘카이로스’의 때다. 일은 사람이 꾸며도 일의 성취는 하나님이 꾸미신다. 또한 토기장이가 토기를 쓸지 안 쓸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듯이 하나님은 사람을 쓸지 안 쓸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 이전에 선택받은 사실로 안주하지 말라. 선택받은 후에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려고 하라.  추운 겨울을 잘 견디고 싹을 틔우며 봄소식을 전하는 복음의 전령으로 쓰임 받는 그릇이 되라. 그릇이 자기 용도대로 쓰여야 만든 사람이나 산 사람에게 기쁨을 주듯이 구원받은 성도도 하나님의 뜻대로 복음 전파를 위해 쓰여야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스스로도 가장 행복해진다. 한국 교회는 한때 영혼구원과 세계선교를 위해서 귀하게 쓰임 받았다. 지금 그런 쓰임새를 잃고 심지어는 불신 세계의 지탄까지 받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본문의 호세아의 음성이 한국 교회를 향한 음성처럼 들린다. < 쓰임 받는 그릇이 되

하나님의 문화 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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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창조와 관련된 사실 >  하나님은 창조 6번째 날에 육지동물, 즉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창조하셨다(24절). 뱀은 원래 기는 것이 아닌 말하는 들짐승으로 창조되었다(창 3:1). 그러다가 저주 받아 배로 기게 되었다(창 3:14). 그렇게 육지동물을 창조하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한 후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사람 창조와 관련된 4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1.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본문 26절에 묘사된 형상(첼렘)과 모양(데무트)은 비슷한 단어인데 굳이 구분하면 형상은 ‘전체적인 속성’을 뜻하고 모양은 ‘외양적인 모습’을 뜻한다. 유사한 두 단어의 반복은 사람이 하나님과 외모와 속성은 물론 분위기도 닮았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사람을 만들고”라는 표현에서 ‘사람’에 대한 히브리어 ‘아담’이란 표현은 ‘일반적인 사람’을 뜻하는 일반명사의 뜻도 있고 ‘최초의 사람인 아담’을 뜻하는 고유명사의 뜻도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창조하셨다(27절). 그 말씀은 사람의 존엄성과 남녀의 평등성을 잘 묘사한다. 결국 모든 사람은 존중되어야 하고 모든 민족도 결국 한 혈통에서 생겨났기에 서로 귀히 여겨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 자체를 미워하지 말라. 사람 자체를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셈이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고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돕고 기도하라.  타락 전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얼마나 복되고 놀라운 것인지를 알 수 없다. 다만 죄로 타락했어도 현재처럼 놀라운 문화를 만든 것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타락 전의 상태가 얼마나 뛰어난 상태였는지 대략 짐작된다. 반면에 지금처럼 문화가 엄청나게 발전했어도 그 이면에 뿌리 깊은 모순들이 무수히 많은 것을 생각할 때 사람에게 침투한 원죄가 얼마나 치명적인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2. 만물을 다스리는 책무가 있다  본문 26절 하반부를 보라.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

You are my all in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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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are my strength when I am weak You are the treasure that I seek You are my all in all Seeking You as a precious jewel Lord to give up I'd be a fool You are my all in all Jesus Lamb of God worthy is your name Jesus Lamb of God worthy is your name Taking my sin my cross my shame Rising again I bless your name You are my all in all When I fall down you pick me up When I am dry You fill my cup You are my all in all Jesus Lamb of God worthy is your name Jesus Lamb of God worthy is your name Jesus Lamb of God worthy is your name Jesus Lamb of God worthy is your name

예수님께 잇대어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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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목표를 분명히 하라 >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가 주는 핵심 교훈은 성도는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하나님은 성도가 열매를 많이 맺기를 원하신다. 그 중에 가장 좋은 열매는 ‘나의 변화’다. 세상을 움직이려고 하기 전에 나를 움직이라. 어떻게 열매를 많이 맺는가? 주님 안에 있어야 한다. 주님 안에 있다는 말은 주님의 방향을 따르고 주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말이다. 주님 밖에서는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없기에 주님께 꼭 붙어 있어야 한다.  돌 감람나무 가지도 참 감람나무에 접붙이면 열매를 맺지만 참 감람나무 가지도 참 감람나무로부터 꺾이고 떨어지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참 감람나무인 예수님께 꼭 붙어있으라. 믿음이란 하나님 안에 있고 예수님께 꼭 붙어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도 품을 수 있는 넓은 품을 가지셨다. 예수님을 어떤 경우에도 붙어있는 가지를 떨어뜨리지 않는다. 사람은 허물과 약점이 보이면 잡은 손을 놓지만 주님은 그때 더욱 붙잡아주신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무엇인가를 붙잡아야 한다. 특히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을 붙잡아야 한다. 어떤 축복도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는 축복에 비할 것이 없다. 주님을 아는 것도 중요하고 찬송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주님께 온전히 붙잡혀야 한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께 온전히 붙잡힌다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죽는다는 것은 크고 두려운 개념이기에 사람은 잘 죽지 못한다. 죽는다는 의식을 너무 가지지 말고 주님께 온전히 붙어있어서 불편을 각오하고 주님의 생명을 살아내라.  눈앞의 편리함 때문에 예수님 품을 떠나지 말라. 약할 때에는 오히려 주님의 강한 사랑이 기다리고 있다. 그 주님의 손에 붙잡히면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다. 바울이 맺었던 놀라운 열매의 원천은 예수님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 역사의 중심도 예수님이고 예수님 안에 모든 축복과 영광과 소망이 있다고 고백했다. 즉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

It Is Well with My S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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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peace like a river, attendeth my way, When sorrows like sea billows roll Whatever my lot, thou hast taught me to say It is well, it is well, with my soul It is well With my soul It is well, it is well with my soul Though Satan should buffet, though trials should come, Let this blest assurance control, That Christ has regarded my helpless estate, And hath shed His own blood for my soul It is well (it is well) With my soul (with my soul) It is well, it is well with my soul My sin, oh, the bliss of this glorious thought My sin, not in part but the whole, Is nailed to the cross, and I bear it no more, Praise the Lord, praise the Lord, o my soul It is well (it is well) With my soul (with my soul) It is well, it is well with my soul It is well (it is well) With my soul (with my soul) It is well, it is well with my soul 작사: P P. Bliss / Gloria Roe It Is Well with My Soul 가사 © Warner/Chappell Music, Inc

친구는 좋은 선택의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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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는 좋은 선택의 열매 >  인생은 선택이듯이 우정도 선택이다. 내가 어떤 친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색깔은 크게 달라진다. 좋은 친구는 좋은 선택의 열매다. 좋은 친구를 얻으려면 먼저 친구를 세워주라. 예수님은 12제자에게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했다. 친구 선택도 중요하지만 선택한 친구를 세워주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다. 친구를 사귈 때 무엇을 얻으려는 계산적인 목적을 가지지 말고 오직 섬기고 세워주려는 목적만 가지라. 즉 덕을 보려고 하기보다는 덕을 주려고 친구를 사귀라. 남이 높여주는 사람이 더욱 높아진다.  친구처럼 중요한 존재는 없다. 자살자의 90%가 참된 친구가 없다고 한다. 자녀에게 친구가 없는 것이 염려되면 부모가 친구가 되어주면 되고 무엇보다 친구 되신 주님을 영접함으로 성령님과 깊이 교제하면 된다. 친구가 그만큼 중요하다. 이단 교주들은 신학교를 다니지 않았거나 신학교에서 왕따 당해서 혼자 지내던 독불장군이었던 경우가 많다. 마음과 얘기가 통하는 친구가 주변에 있으면 이단에 빠질 확률도 크게 낮아진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사슴들이 떼를 지어 있으면 아무리 연약한 사슴도 맹수가 쉽게 공격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슴이 혼자 떨어져 풀을 뜯으면 곧 맹수의 공격 목표가 된다. 그처럼 사탄이 호시탐탐 영혼을 삼키려고 할 때 좋은 친구가 곁에 있으면 자기를 더 잘 지킬 수 있다. 좋은 친구를 잘 선택해서 그 친구를 세워주라. 또한 나를 친구 삼고 세워주시는 주님이 내 곁에 있음도 항상 잊지 말라.  성경은 내가 하나님을 택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다고 강조한다. 만약 내가 하나님을 잡았다면 얼마나 힘들고 불안한가?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내 손을 잡아주니까 얼마나 든든하고 안심이 되는가? 늘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된 사랑을 입은 존재임을 기억하라. 현재의 처지가 어려워도 그것도 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진 일로서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뤄주실 것이다. < 열매를 많이 맺는 삶 >  왜 주님이

주님의 도구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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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의 나눔을 꾀하라 >  교회가 건전하게 분립하면 교회의 내적인 영향력은 더 확대된다. 그렇게 분립하고 선교해서 더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면 초대형 교회 자체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초대형 교회는 예배드리러 가서 주차할 때부터 경쟁하게 된다. 결국 새로운 토지확보와 건축을 꾀하게 된다. 그것이 불신자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비치기 힘들다. ‘힘의 나눔’은 감동을 일으키지만 ‘힘의 과시’는 반발을 일으킨다. 결국 그 교회는 성장해도 불신 사회의 반발도 심해져서 오히려 전체적인 전도는 더 막힌다. 안타까운 일이다.  교회건축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어떤 목회자는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교회건축을 한다. 예전에는 교회를 건축하면 그 교회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렸기에 교회건축이란 극심한 고난의 터널을 지나면 광명한 부흥의 때가 왔다. 그러나 요새는 교회건축의 극심한 고난의 터널을 지난 후에도 광명한 부흥의 때가 오지 않고 정체를 속히 벗어나지 못하고 빚 등으로 인한 새로운 고난의 터널이 시작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런 현실을 인식하면서도 어떤 목회자는 후임자에게 부흥의 기반을 물려주려고 자기 것도 힘써 드려 건축하면서 때가 되면 빈손으로 기쁘게 물러나겠다는 아름다운 퇴장을 생각하고 성도들의 기쁜 동의하에 무리수를 쓰지 않고 교회건축을 한다. 그런 건축은 아름다운 일이다. 반면에 외형적 성장에 대한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건축하면 대개 결말이 비참해진다. 열심은 좋은 것이지만 방향이 잘못된 열심은 가장 나쁜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두매 출신의 왕 헤롯이 유대인의 민심을 얻으려고 건축한 거대한 성전을 보고 한 제자가 예수님께 물었다. “선생님! 보세요. 이 돌들과 건물들 어떻습니까?” 그때 예수님은 성전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경탄보다는 탄식하며 말씀했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지금 한국교회를 보면 그 예수님의 탄식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것 같다. < 주님의 도구가 되라 &g

사랑을 사명으로 발전시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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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는 주님께 매임에 있다 >  사람은 만사형통과 신비한 능력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변화된 삶을 원하신다. 능력과 은사를 보여주어도 마음과 입술이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세상에 매여 살면 허무한 신앙놀음처럼 된다. 사람이 “무엇에 매여 사느냐?”는 것은 행복을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미신에 매여 산다. 미신은 믿으면 믿을수록 자유를 잃고 불행해진다. 함부로 이사도 못 가고 점을 쳐서 이사 날짜를 받아야 한다. 결혼도 아무 때나 못한다. 심한 사람은 영기가 막힌다고 못도 아무 데나 박지 못한다. 미신은 믿을수록 두려움과 불안이 많아진다.  점쟁이들이 저주가 섞인 말로 불안과 두려움을 주는 이유는 영혼의 자유를 빼앗고 마음대로 끌고 다니기 위해서다. 점을 치러 온 사람에게 평강과 위로의 말을 해주는 점쟁이는 없다. 그러면 복채가 나올 곳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영혼을 얽매는 데는 많은 얘기가 필요 없다. 이런 말 한 마디면 된다. “남편 조심해. 3년이 고비야.”  인생이란 크고 작은 사건의 연속이다. 하물며 3년 동안 전혀 사건이 없겠는가?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에도 하나님이 붙들어주심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점쟁이의 말 한 마디를 즉시 물리치지 않고 받으면 믿음 다 팔아먹고 3년 동안은 불안과 두려움에 싸여 영혼의 노예처럼 살게 된다. 미신은 믿으면 믿을수록 자유를 잃고 불행해진다. 사람들이 자유를 잃고 불행해지는 이유는 참된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잘못된 사람 말에 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매이면 축복 받는 인생이 되지만 저주의 말에 매이면 저주 받는 인생이 되고 세상과 사탄에 매인다. 세상의 종이 되지 말고 주님의 종이 되라. 주의 종이기에 “주님 뜻이라면 다 잃어도 좋습니다.”라고 고백하라. 욥은 모든 것을 다 잃었지만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어다(욥 1:21).”라고 철저한 종의 고백을 했다. 그 고백을 통해 욥은 다 얻었을 때

자기를 버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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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룟 유다가 되지 않는 길 >  가룟 유다 이전까지 유다란 이름은 유대인에게는 아주 흔하고 명예로운 이름이었다. 그러나 가룟 유다 이후로 그 이름은 기독교계에서는 전혀 쓰이지 않는다. 가룟 유다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수치스런 존재가 되었다. 그처럼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자기 생각을 버리라  왜 가룟 유다가 한때 예수님을 열렬히 따랐는가? 그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예수님이 보통 분이 아닌 것을 알고 자기 욕망이 투영된 이런 결심을 했을 것이다. “내가 저분을 모시고 세상을 바꾸리라. 로마의 압제를 넘어서리라.” 제자의 삶을 결심할 때 가룟 유다처럼 결심하면 배반의 길로 가기도 쉽다. 리더의 능력과 인격과 비전을 신뢰하면 “내가 저분을 모시고 따르리라.”고 결심하고 순전하게 따라야지 “내가 저분을 모시고 세상을 바꾸리라.”고 하면서 처음부터 자기 욕망을 투영한 상태로 따르면 언젠가는 배반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  다른 11명의 제자는 순전하게 “내가 예수님을 모시고 따르리라.”고 결심하고 따랐기에 예수님의 길과 태도와 활동이 자기 생각에 이해되지 않아도 쉽게 의문을 품지 않고 예수님의 사역이 기대만큼 커지지 않아도 그 결심이 변하지 않았다. 반면에 가룟 유다는 자기 욕망을 투영해 “내가 예수님을 모시고 세상을 바꾸리라.”고 결심하고 따랐기에 예수님의 길과 태도와 활동이 자기 생각에 이해되지 않으면 금방 의문을 품었다. “왜 예수님이 저렇게 행동하실까? 왜 공동체 성장에는 관심이 없을까? 힘이 있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는데...”  그는 개인적인 욕망을 품고 예수님을 따랐기에 마음도 조급했다. 또한 예수님이 엄청난 능력을 활용해 큰 부흥의 바람을 일으키지 않고 정적으로 활동하니까 답답했다. “저러면 어떻게 세상을 바꾸나?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무리가 몰려들 때 잡지 않고 이상한 말씀으로 오히려 무리를 떠나가게 하면 무슨 희망이 있는가?” 점점 그의 생각은 확신으로 변해갔다. 시간이 지나도 예수님의 공동체는 외적으로 별로

높은 사람으로서 섬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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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높은 사람으로서 섬기라 >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다(딤전 6:10). 돈을 지나치게 사랑해서 자기 품에만 있게 하지 말라. 돈은 건강하게 돌고 좋은 일에 쓰일 때 제 구실을 한다. 좋은 일에 쓰지 않는 부는 천국 길을 막는다. 다만 돈 자체를 신앙의 적처럼 여기지는 말라. 돈을 사랑함이 악의 뿌리가 되는 것이지 돈 자체가 나쁜 것이나 악의 뿌리는 아니다. 돈의 성격은 소유자의 인격과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 불의한 자가 가진 돈은 악한 것이지만 의로운 자가 가진 돈은 선한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 개념에는 경제적인 축복 개념도 포함된다. 돈을 경시하거나 도외시하지 말라. 불신자들이 자나 깨나 돈 생각을 하면서 온갖 수단으로 경제 영역을 확대시킬 때 성도들이 팔짱만 낀 채 사탄에게 경제 영역을 다 빼앗기면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영육 간에 최선을 다하는 최선책을 기뻐하시지 영적인 삶에만 최선을 다하는 차선책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예수님이 “겸손하게 낮아지라.”고 하신 것은 “자세를 낮추라.”는 것이지 “실력을 낮추라.”는 것이 아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 제자들 사이에 누가 높으냐는 다툼이 생기자 예수님이 말씀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43-44절).” 사람들은 그 말씀을 높아지면 안 된다는 말씀으로 오해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높아지려는 목적이 섬김 받는 것에 있음을 알고 책망하신 것이지 높아지는 것 자체를 책망하시지는 않았다.  낮은 사람으로서 섬겨도 좋지만 높은 사람으로서 섬기면 더 좋다. 종이 종처럼 섬기는 것은 보통 일이지만 주인이 종처럼 사람을 섬기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하나님은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겸손한 종이 되기를 원하신다. 바른 방법과 과정을 통해 대리는 과장이 되려고 하고 과장은 부장이 되려고 하라. 그러면서 과장이 되면 대리처럼 섬기고

끝까지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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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까지 사랑하라 >  예수님은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1절). 예수님이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이 얼마나 감격적인가?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이 참된 사랑이다. 미성숙한 자녀의 제일 뚜렷한 특징은 일이 잘못되면 부모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이다. 부모가 어떤 잘못을 했어도 자신의 잘못을 덮어주었던 무수한 일들을 생각하면 부모에게 불평하고 짜증내는 일은 극히 삼가야 한다.  부모는 자녀가 짜증내면 허겁지겁 자녀의 불평하는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한다. 그 모습에 깃든 깊은 사랑을 생각하고 “엄마 아빠! 제 생각이 짧았어요. 저로 인해 엄마 아빠가 그렇게 연약하고 불쌍한 모습을 보이면 너무 마음 아파요.”라고 해야 정상이다. 그러나 미성숙한 자녀는 그 부모의 사랑을 보통은 매정하게 뿌리쳤다가 나중에 철들어서 자신의 그런 태도를 가장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후회한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죄송스러운 모습은 자기밖에 모르는 모습이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모습이다. 그런 철부지 인생도 하나님은 사랑하신다. 그 사랑을 힘써 배우고 전파하라. 아는 것도 잘해야 하지만 이해하는 것도 잘해야 한다. 알려고 해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혹시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면 사랑 받는 남도 좋게 되지만 나는 더 좋게 된다. 마음의 공허는 사랑이 없는 표식이다.  사랑할 때는 예수님처럼 끝까지 사랑하라.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다. 중도에 포기하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니다. 인생은 가도 예술은 남고 예술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 변하지 않고 사랑을 할 때 그의 영향력은 그 사랑만큼 커진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마지막도 중요하다. 시작이 잘못 되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고 시작과 과정이 좋아도 마지막이 나쁘면 허무해진다.사람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떠날 때 잘 떠나는 것이다. 예수님은

윤복희 - 사도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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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면 어찌 가리오  기쁜 소식 받지 못한 형제 주님을 볼 것이오  듣지 못한 형제들이 주님의 진리 깨달으리라  우리가 어려운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어려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담을 연정은 소망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나의 십자가 무겁지 않아요  나의 길도 험하지 않아요  항상 동행하시니 저 혼자가 아님을 압니다  주님 예수님 감사해요  제가 곤하고 지쳐서 이 달음박질  끝내기를 바래도 세상에서 하실 일 이루셔야  이 달음박질 끝내주시리라 압니다  견딜 수 없을 때 언제나 가볍게 하시기에  견딜 수 없을 때 견딜 힘을 주시기에  견딜 수 없을 때 제 손을 잡아주시는  주님 감사 감사 할렐루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말씀에 순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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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를 추구하라 >  예수님은 “나를 믿는 것은 나를 보내신 이는 믿는 것이다.”라고 하셨다(44절). 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는가? 어둔 세상에 빛을 비추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였다(46-47절). 구체적으로 말하면 세상에 참된 평화를 가져다주기 위해서였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 무엇보다 실천해야 할 삶이 평화를 추구하는 삶이다. 교회생활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도 평화를 추구하는 모습이다.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다. 마가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의 개척멤버를 통해 시작되어 사랑이 넘치는 교제가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에도 어려운 과부를 구제하는 문제로 갈등이 있었다. 교회와 목회자와 교인의 허물을 보고 너무 실망하거나 충격 받지 말라. 가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지만 초대 교회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초대 교회도 문제가 많았다. 성도가 추구해야 할 교회는 ‘초대의 교회’가 아니라 ‘주님의 교회’다.  교회생활을 평화롭게 하려면 자신이 가진 좋은 생각도 때로는 양보하라. 가끔 좋은 일을 할 때 생기는 갈등은 대개 좋은 일을 더 잘하려다가 의견차이로 생기기에 사람들에게 더 충격을 준다. 좋은 일과 좋은 가치만 생각하지 말라. 내가 생각하는 좋은 것조차 평화를 위해 양보할 줄도 알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의 벽을 무너뜨리고 평화를 이루셨다. 그런 평화를 세상에서 이뤄낼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다.  욕망을 위해 숨차게 달리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주님의 뜻이 무엇이고, 내가 어디쯤 와 있고, 남이 내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이고, 나와 더불어 사는 이웃이 누구인지 살피면서 이웃에게 평화를 힘써 전하라.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피해자에게 한 일은 생명을 살려준 일만이 아니라 그의 마음에 평화의 씨앗을 심은 일이다. 한 영혼의 밭에 심긴 사랑과 평화의 씨앗은 분열된 세상을 치유한다. 세상이 어둡다고 불평만 하지 말고 어둔 세상에 빛과 평화를 전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 < 말씀에 순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