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018의 게시물 표시

은사와 관련된 4대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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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라  은사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분량대로 주셨다(7절). 내 생각으로 남을 재단하거나 판단하지 말라. 믿음의 실천을 감동으로 이끌되 강요는 삼가라. 사람마다 믿음의 그릇이 다르다. 일과 봉사도 믿음의 그릇대로 해야 한다. 한 분야에서 다 똑같이 잘날 필요는 없다. 자기 분량대로 주어진 재능과 은사를 따라 사는 것이 행복이다. 자기 재능을 살린 분야의 장인이 되는 것이 팔방미인이 되는 것보다 낫다.  어떤 교인은 “저는 재능이 하나도 없어요.”라고 말한다. 그 말은 틀린 말이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재능 없이 이 세상에 보내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독특하고 고유한 재능이 있다. 남의 재능이 내 재능보다 화려해 보일 수는 있지만 그런 결과가 있기까지 흘린 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땀을 투자하면 누구나 자기 재능을 특출하게 만들 수 있다. 땀도 없이 재능이 없다거나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에게만 없다고 여기지 말라.  하나님의 원초적인 은혜의 크기는 사람마다 큰 차이가 없다. 그 은혜를 어떻게 구체화시켜내느냐에 따라 차이가 커지는 것이다. 저는 두 딸을 똑같이 사랑하기에 기본적인 은혜는 거의 똑같이 준다. 그러나 구체적인 선물은 나이와 개성과 태도와 재능에 따라 다르게 준다. 사랑하는 마음은 같아도 부모가 자녀에게 다른 선물을 주듯이 하나님도 사람마다 가장 적절하게 다른 선물을 나눠주신다. 그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남이 나와 다른 존재임을 이해하는 관용을 사회학적 용어로 똘레랑스라고 한다. 영어로는 톨러런스(tolerance)라고 한다. 똘레랑스란 남의 행동양식을 이해하고 존중한다는 뜻이다. 남의 행동양식을 존중할 때 내 행동양식도 존중받는다. 예절바르다는 것은 인사 잘하고 교양 있는 것도 의미하지만 가장 기초적인 의미는 사람의 차이를 인정하는 똘레랑스의 자세를 가지는 것이다.  명백한 잘못이나 무례도 아닌데 남에게 “어떻게 그렇게 행동하는가? 좀 바꿔라.”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무례한 태도다. 반면에 “그는 나와 다르

진정한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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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혜에 감사하며 살라 >  왜 사도 바울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는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고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끊임없이 은혜의 선물을 주셨기 때문이다(7절). 사도 바울은 복음의 일꾼으로 지내면서 고통과 시련이 많았지만 그것조차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여겼다. 그처럼 고통조차 하나님의 은혜로 여길 줄 아는 전천후 감사신앙을 가지고 일이 잘 될 때뿐만 아니라 일이 안 될 때도 감사하라.  감사는 은혜 받는 제일 통로이고 최고의 축복 재료다. 감사하면 삶에 활력도 넘친다. 은혜를 크게 보면 감사가 나오고, 감사하면 은혜가 커진다. 또한 감사는 불행의 물줄기를 행복으로 돌리고 저주의 물줄기를 축복으로 돌리는 위대한 통로가 되기도 하고 성숙함과 깊은 영성을 나타내는 최고의 지표다. 최고의 기도도 범사에 감사하는 기도다. 결국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축복 받고 매사에 불평하는 사람은 결코 축복받지 못한다.  누군가 당연히 할 일을 했어도 은혜와 사랑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표현할 줄 알라. 모든 관계가 다 그렇다. 감사가 있어야 신앙생활과 인간관계에 실패가 없다. 고난 중에도 감사하라. 우울증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도 범사에 감사하는 삶의 훈련이다. 범사에 감사하는 삶은 가장 미래지향적인 삶이다. 무엇을 얻었다는 현실보다 무엇을 얻을 것이란 믿음으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범사에 감사하면 눈앞의 복을 생각하지 않아도 복된 존재가 되는 길이 활짝 열린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했다(8절).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며 감사했기 때문이다. 감사와 겸손은 일란성 쌍생아와 같다. 바울 당시에 어떤 교회들은 크게 성장했지만 그에 비해 사도 바울은 초라하게 텐트를 만들면서 생활비를 충당했고 수시로 감옥에 갇혀 겉으로 보기에는 실패자였다. 그래도 자신을 실패자로 여기며 우울해지지 않고 자기 죄와 허물에 비하면 그것도 감사한 일이라고 여겼다.  사람들은 외형과 숫자로 인생의

남을 높여주고 배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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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을 높여주고 배려하라 >  어떻게 화평을 만들 수 있는가? 십자가를 앞세워야 한다(16절). 화평을 만드는 사람은 입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로 말하는 사람이다. 십자가가 없는 화평은 없다. 신앙생활의 핵심도 십자가다. 크게 수고해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자신은 힘써 감추라.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교회생활을 잘하려면 십자가를 잘 져야 한다. 남을 높여주고 배려하는 삶도 십자가의 삶이다.  화평을 원하면 함께 하는 상대에 대해 연구해서 무엇이 그를 낙심시키고 행복하게 만드는지를 알라. 또한 그의 필요를 파악해 채워주고 그가 좋아하는 것을 존중해주라. 사람마다 좋아하는 것과 가치관이 다르다. 자녀 교육을 위해 여행 보내는 부모가 학원 보내는 부모를 “왜 어렸을 때부터 저렇게 공부만 시켜! 시야를 넓혀야지.”라고 탓해도 안 되고 학원 보내는 부모가 여행 보내는 부모를 “왜 저렇게 노는데 돈을 낭비해.”라고 탓해도 안 된다.  가족에게 언제 무엇을 주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연구해서 그들을 편하게 해주라. 가족을 편하게 해줄 때 자신도 편해진다. 남편이 어떤 일로 힘들어하면 남편이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집안 문제 얘기는 삼가라. 할 말도 적절한 때를 찾아 하라. 사람들은 대개 월요일 아침에 스트레스가 크다. 그때는 무리한 부탁을 자제하고 그런 부탁은 월요일 오후나 다른 날에 하는 것이 좋다. 타이밍도 중요하다. 좋은 얘기도 좋지 않는 때 하면 좋지 않게 된다.  생리 전에 신경이 예민해지는 증상을 PMS라고 한다. 그 시기에는 아내가 싫어하는 말을 되도록 삼가고 “말씀만 하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자세를 가지라. 가족이 집에 들어오면 최대한 기쁘게 맞아주는 것도 존중이다. 가족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설 때 처음 2분의 반응이 그 이후의 2시간보다 더 가족관계를 살찌게 한다. 조금 더 관심을 주라. 누군가 어디가 아프다고 하면 그 아픈 것을 치료해달라는 뜻도 있지만 더 관심을 기울여달라는 뜻도 있다.  거룩한 눈치를

화평과 관련된 3종류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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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평을 깨는 사람(Peace-breaker)  화평을 깨는 사람들은 자기 길을 이탈해서 관계를 깨뜨리고 문제와 분란을 일으키며 모든 것에 비판적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정의’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자기’를 내세우면서 남을 조종하려고 하기에 화평이 깨진다. 화평을 깨고 분란을 일으키면 축복과 영생이 막힌다. 누가 화평을 깨고 싶겠는가? 문제는 화평을 깨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문제를 일으키는 줄을 모르면서 바른 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무엇으로 화평이 깨지는가? 대개 말로 깨진다. 가십, 비방, 참견, 편견, 정죄, 판단이 교회를 찢고 분파와 마찰을 일으키기에 끊임없이 좋은 말을 훈련하고 연습하라. 말에는 살리는 것 같으나 죽이는 말이 있고 죽이는 것 같으나 살리는 말이 있다. 말을 잘 가려서 하고 특히 2가지 말, 즉 자기를 자랑하는 말과 남을 비방하는 말을 조심하라.  교회가 왜 어려워지는가? 그 원인에는 교인의 도덕적 타락, 교회에 대한 매스컴의 공격, 그리고 재정적인 어려움 등이 있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은 잘 극복되면 나중에는 오히려 축복의 터전이 된다. 그러나 혀를 잘못 놀리면 교회는 회복할 기회도 없이 산산이 깨진다. 그래서 성경은 혀를 주의하라고 지나칠 정도로 강조한다. 잘 알지 못하면 말을 지극히 주의하고 잘 알아도 말을 주의하라. 2. 화평을 가장하는 사람(Peace-faker)  화평을 가장하는 사람들은 진리보다는 화평을 선호한다. 그들은 화평을 논쟁과 의견차이가 없는 것으로 여겨 갈등과 불편을 피하려고 가장된 평화를 추구한다. 그러면 진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누가 봐도 명백히 잘못했으면 갈등이 예상되어도 지혜롭게 바른 말을 해주어야 한다. 친구가 마약을 하면 친구와 갈등이 예상되어도 하지 말라고 말해주어야 한다.  어느 날 한 집사가 도박에 빠진 친구에게 도박을 끊으라고 했다. 그 친구는 테이블까지 치며 크게 흥분했다. 결국 그 집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그 후 그 친구는 돈과 가족을 다 잃고 거의

대기 장소 The Waiting 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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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ing for the fish to bite or waiting for wind to fly a kite. Or waiting around for Friday night . . . . Everyone is just waiting”―or so Dr. Seuss, author of many children’s books, says. “물고기가 미끼를 물기를 기다리거나, 연을 날리려고 바람이 불기를 기다리거나, 혹은 금요일 저녁을 기다리거나… 모든 사람들은 그저 그렇게 기다리고 있다.”라고 어린이 책을 많이 쓴 작가 닥터 수스는 말합니다. So much of life is about waiting, but God is never in a hurry―or so it seems. “God has His hour and delay,” suggests an old, reliable saying. Thus we wait. 인생의 아주 많은 부분이 기다리는 것에 관한 것이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아니, 어쩌면 그러신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는 그분의 때가 있으며 시간을 늦추기도 하신다.”라는 믿을 만한 오래된 격언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립니다. Waiting is hard. We twiddle our thumbs, shuffle our feet, stifle our yawns, heave long sighs, and fret inwardly in frustration. Why must I live with this awkward person, this tedious job, this embarrassing behavior, this health issue that will not go away? Why doesn’t God come through? 기다림은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손을 깍지 낀 채 두 엄지손가락을 빙빙 돌리기도 하고, 발을 이리저리 움직이거나, 하품을 꾹 참거나, 긴 한숨을 쉬고, 좌절감으

비전 성취에 필요한 4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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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 성취에 필요한 4가지 (엡 2:8-10) < 비전 성취에 필요한 4가지 >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기 일생을 걸고 해야 할 소중한 일인 사명을 발견한 사람이다. 사명에 의해 세워진 꿈을 비전이라고 한다. 비전을 향해 열심히 달리면 행복해지고 복도 주어진다. 목숨을 걸고 추구할 비전이 없으면 복된 인생도 살기 힘들다. 반면에 인생의 목적이 분명하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 누구든지 복된 삶을 살 수 있다. 비전을 현실로 만들고 영향력 있게 만들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1. 굳건한 믿음  구원은 자기 행위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8절). 하나님은 그 선물을 주시고 다시 빼앗아가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구원받은 성도는 아무리 노력해도 지옥에 갈 수 없다.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고 믿음에서 난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을 보면 “귀신들도 믿고 떤다.”는 말씀이 있다. 귀신들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지식적인 믿음은 있다.  또한 믿음은 낙관주의나 긍정적인 사고가 아니다. 믿음은 주관적인 느낌이 아닌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참된 믿음은 ‘믿음의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주님’을 믿는 것이기에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사람의 말이나 감정이나 환경에도 쉽게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성경을 보면 자기에게 적용되는 찔리는 말씀이 많다. 그때 참된 믿음을 가지고 감정을 넘어 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을 가지고 말씀을 받으면 복된 삶이 펼쳐진다. 반면에 그 찔리는 말씀을 통해 쉽게 상처를 받고 시험에 들면 인물의 길은 그만큼 험난해진다.  얼마 전 필자는 예배 때 첼로 반주 봉사를 하게 된 집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집사님! 세상에서는 최고의 첼리스트를 꿈꾸고 자기 영역을 힘써 구축하되 교회에서는 사람 앞에서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 연주한다고 생각하고 흔들리지 않은 굳건한 믿음으로 봉사해주십시오.” 큰 교회에서 멋지게 첼로 봉사를 해도 좋겠

The Secret of Peace 평강의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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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ecret of peace is our relationship to Jesus Christ. He is our peace. When Jesus is our Savior and Lord, and as we become more like Him, peace becomes real. Things like sickness, financial difficulties, or danger may be present, but peace reassures us that God holds our lives in His hands(Daniel 5:23), and we can trust that things will work together for good. [ Keila Ochoa] 평강의 비결은 우리의 평강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와 주님이 되시고 우리가 그분을 점점 닮아갈수록 평강은 현실이 됩니다. 질병이나 금전적 어려움, 위험한 일 등이 있다고 해도, 평강이 있음으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손으로 우리의 삶을 붙들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고(단 5:23),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6-18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서 이렇게 쓰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 Our Daily Bread 20180423 "The Secret of Peace" ] [ 오늘의 양식 20180423 "평강의 비결" ]

God in the Details 세밀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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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tells us in Matthew 10:30 that “even the very hairs of your head are all numbered.” God is so great that He is able to take infinite interest in the most intimate details of our lives. There is nothing so small that it escapes His notice, and there is no concern too trivial to bring before Him. He simply cares that much.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30절에서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너무 위대하셔서 우리 삶의 가장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관심을 쏟으실 수 있습니다. 주님의 눈길을 피할 만큼 작은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주님 앞에 내어놓지 못할 만큼 사소한 문제도 없습니다. 주님은 그 정도로 우리를 돌보십니다. God not only created us; He sustains and keeps us through every moment. It’s sometimes said that “the devil is in the details.” But it’s better by far to understand that God is in them, watching over even the things that escape our notice. How comforting it is to know that our perfectly wise and caring heavenly Father holds us―along with all of creation―in His strong and loving hands. [James Banks]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매 순간 우리를 지탱하시고 지켜주십니다. “대부분의 문제는 사소한 곳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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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적인 감사를 하라 >  현대인들은 역사상 어느 때보다 문명의 이기를 통해 많이 누리며 살지만 역사상 어느 때보다 만족이 적은 편이다. 그 이유가 너무 많이 가졌기 때문이라는 역설적인 분석도 있다. 대형 마트에 가면 살 물건들이 너무나 많다. 라면 종류만 수십 개다. 너무 선택할 것도 많고 누릴 것도 많지만 동시에 우울한 사람도 많고 불행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왜 그런 문제가 생기는가? 하나님이 없이 삶의 의미와 영생을 모른 채 현재 눈에 보이는 것만 위해 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성찰도 없이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면서 세상이 천국처럼 되고 일이 잘 풀리기를 원하니까 그럴수록 현실과 괴리되어 마음은 더 비참해지고 우울해지기 쉽다.  TV 광고들은 돈이 행복을 주는 것처럼 유혹한다. 그 광고를 보면 브랜드 있는 아파트나 좋은 외제차나 명품이 행복을 줄 것 같다. 또한 부동산 전문가나 투자 전문가의 말을 들으면 다 부자가 될 것 같다. 그처럼 잘못된 환상에 빠지면 불행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오히려 행복으로 나가는 출구가 없는 것 같다. 어떻게 진짜 행복과 희망을 가질 수 있는가? 잘못된 환상을 버리면 진짜 희망을 발견할 수 있고 잘못된 길을 버리면 진짜 길을 발견할 수 있다.  현실이 어렵고 혼란할수록 더욱 성경을 가까이하라. 성경은 참된 행복을 주는 원리들을 가르쳐주는데 그 중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감사하는 삶이라고 말한다. 의미 있는 삶을 원하면 감사를 삶의 틀로 삼으라. 욥은 큰 시련을 당하고 하나님을 저주하라는 말을 들어도 변함없이 하나님께 감사했다. 다윗도 극심한 시련 중에 감사의 시편을 많이 썼다.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파하다가 로마 감옥에 갇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본문에서 감사하고 찬양했다. 그런 혁명적인 감사(radical gratitude)가 필요하다. <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라 >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The Art of Forgiveness 용서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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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afternoon I spent two hours at an art exhibit― The Father & His Two Sons: The Art of Forgiveness ―in which all of the pieces were focused on Jesus’s parable of the prodigal son(see Luke 15:11–31). I found Edward Riojas’s painting  The Prodigal Son  especially powerful. The painting portrays the once wayward son returning home, wearing rags and walking with his head down. With a land of death behind him, he steps onto a pathway where his father is already running toward him. At the bottom of the painting are Jesus’s words, “But when he was yet a great way off, his father saw him, and had compassion”(Luke 15:20). 어느 날 오후 나는 〈아버지와 두 아들: 용서의 미학〉이라는 제목의 미술 전시회에서 두 시간을 보냈습니다. 모든 작품은 예수님의 탕자 비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눅 15:11-31 참조). 나에게는 에드워드 로자스의 작품 〈탕자〉가 특히 강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 그림은 한때 방탕했던 아들이 누더기를 입고 고개를 떨어뜨린 채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죽음의 땅을 뒤로 하고, 그는 이미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아버지가 있는 길로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그 그림의 아래쪽에는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20절)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I was deeply moved by realizin

영안이 생길 때의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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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망의 실체를 깨닫는다  본문 18절 중반부를 보라.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성도를 어떤 일로 부르신 것은 부담이 아니라 오히려 소망이다. 즉 하나님이 내게 어떤 일을 시키는 것은 내게 희망이 있다는 증거이고 앞으로 하나님이 넘치게 축복을 주실 것임을 나타내는 희망의 전조다. 지금 사람들이 가장 굶주려 있는 것이 ‘희망’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가 얼마나 복된 존재인가? 늘 넘치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절망 중에도 희망을 보라. 간신히 힘들게 살지 말고 간절히 무엇인가를 추구하며 기쁘게 살라. 믿음이 굳건해지면 희망도 넘치게 된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고 예배와 기도의 자리로 부르셨다는 것이 희망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일을 위한 어떤 부담을 주신 것도 희망이다. 현재의 모습이 부족해도 넘치는 희망을 가지고 살라. 하나님은 나를 현재의 모습대로 다루지 아니하시고 늘 예수님 안에서 나의 가능성을 보시고 다루신다.  하나님은 자식도 없는 노인을 불러서 그의 이름을 ‘열국의 아비’란 뜻을 가진 ‘아브라함’이라 부르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다. 또한 사기꾼 같은 야곱을 불러서 그의 이름을 ‘하나님을 이긴 자’라는 뜻을 가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로 삼으셨다. 예수님은 갈대와 같은 시몬에게 ‘반석’이란 뜻을 가진 ‘베드로’란 이름을 주시고 그를 교회의 반석과 같은 존재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나도 그렇게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그런 소망의 실체을 깨달으라. 2. 풍성의 실체를 깨닫는다  본문 18절 하반부를 보라.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이 구절에서 ‘그 기업’이란 ‘하나님의 기업’으로서 성도를 뜻한다. 흔히 ‘풍성한 축복’이란 말을 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외적인 축복을 생각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큰 축복은 내가 하나님의 기업이 된 것이다. 나는 하나님에 의해 소유되고 사랑 받는 존재다. 하나님의 소유란 존재 의식을 가지고 말씀대로 순종하면 점점 풍성한 축복도 따라온

Judging Origins 출신으로 평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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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 so often seems to choose the unlikeliest people to do His work, doesn’t He? It doesn’t matter where we’re from, how we got here, or what we’ve done. What matters is that we respond in faith to His love. [Tim Gustafson] 하나님은 종종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들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됐는지, 혹은 우리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 Our Daily Bread 20180418 "Judging Origins" ] [ 오늘의 양식 20180418 "출신으로 평가하다" ]

잘 분별해서 들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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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혜와 계시의 중요성 >  본문에는 에베소 교인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기도가 나온다. 이 기도는 남을 위해 중보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본과도 같다. 그가 기도를 할 때 첫 번째로 기도한 것이 무엇인가? 본문 17절을 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첫 번째로 기도한 것은 “하나님! 저희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소서.”라는 기도였다. 그것은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지혜와 계시의 영’이란 뜻도 된다.  왜 사도 바울이 지혜와 계시의 영을 달라고 기도했는가? 그래야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되기 때문이다. 본문은 계시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교정하게 만든다. 계시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와 “하나님이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신가?”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전달되는 메시지를 뜻한다. 계시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유발하는 어떤 신기한 얘기나 기발한 얘기가 아니다.  가끔 어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았다.”고 말한다. 그런 말은 주의해 사용하고 주의해 들으라. 물론 “하나님이 마음속에 어떤 음성을 주셨다. 선한 행동을 하려는 어떤 감동을 주셨다. 말씀을 묵상할 때 어떤 깨달음을 주셨다.”라고 말하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성경에 없는 말이나 반하는 말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또한 성경을 해석한다면서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것도 잘못이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16장 12절에 나오는 ‘동방’이란 표현을 통해 한국인이 마지막 때에 선택된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우리나라가 이전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그 이름이 일본어로는 조센이고 영어로는 ‘chosen(선택된)’이기에 한국인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그런 해석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사명감을 도전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라도 해도 그것을 진리처럼 확신하듯이 주장하면 안 된다. &l

예정론에 내포된 3대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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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인생의 집을 다 지어서 주시는 하나님이라기보다 인생의 집을 지을 수 있는 여건과 자재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여건과 자재를 잘 활용하면 누구나 멋진 인생의 집을 지을 수 있다. 거지로 예정된 사람은 없다. 꼴찌로 예정된 사람이나 실패하기로 예정된 사람도 없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나아가면 누구나 복된 인생을 살 수 있다. 개인의 운명은 생각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현실은 대개 과거에 가졌던 생각의 결과다.  생각이 고상하면 고상해지고 생각이 비천하면 비천해진다. 성공 위주로 생각하면 성공 가능성이 커지고 실패 위주로 생각하면 실패 가능성이 커진다. 현실을 바꾸려면 생각부터 바꾸라. 큰 꿈을 품고 큰 생각을 해야 복 받을 확률도 커진다. 링컨은 16세에 노예매매 장면을 보고 노예제도를 폐지하겠다는 꿈을 품었기에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대통령의 복을 얻었다. 거룩한 꿈을 가지면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인프라(기반시설)가 주어진다.  예정론도 앞날이 결정되었다는 의미보다 앞날이 약속되었다는 의미가 더 크다. 본문 11절을 보라.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 구절에서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예정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이 창세전에 미리 예정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의 예정이 말해주는 3가지 메시지가 있다. 1.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믿음과 염려는 반대되는 것이다. 염려는 가치도 없고 생산성도 없는 것입니다. 염려하는 자는 실질적인 무신론자다. 성경에 나오는 무수한 약속을 아무 소용도 없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앞날이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약속된 것이다. 너무나 그 약속이 뚜렷해서 마치 앞날이 결정된 것처럼 오해할 정도다. 염려는 대개 내일의 짐까지 오늘 지려고 하면서 생긴다. 누구도 하루의 짐 때문에 쓰러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Learning to Know God 하나님을 깊이 알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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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as long as I can remember, I’ve wanted to be a mother. I dreamed about getting married, getting pregnant, and holding my baby in my arms for the first time. When I finally got married, my husband and I never even considered waiting to expand our family. But with each negative pregnancy test, we realized we were struggling with infertility. Months of doctors’ visits, tests, and tears followed. We were in the middle of a storm. Infertility was a bitter pill to swallow and left me wondering about God’s goodness and faithfulness. 내 기억에 나는 오래전부터 어머니가 되고 싶었습니다. 결혼하고 임신하여 처음으로 내 아기를 내 팔에 안아보는 그 순간을 꿈꾸었습니다. 마침내 결혼했을 때, 남편과 나는 아기가 생기지 않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임신검사가 매번 부정적인 결과로 나오자, 우리가 불임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몇 달간 계속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고, 그 결과에 울었습니다. 우리는 폭풍우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불임은 삼키기 힘든 쓴 약이었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When I reflect on our journey, I think about the story of the disciples caught in the storm on the sea in John 6. As they struggled against the waves in the dark o

내 수고를 보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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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수고를 보시는 하나님’의 뜻 >  본문에는 20년 만에 귀향하는 야곱이 외삼촌 라반 앞에서 하나님을 ‘내 고난과 수고를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42절). 그 고백은 어떤 뜻을 내포하는가? 1. 하나님은 내 처지를 아신다  야곱이 귀향할 때 야곱의 아내 라헬이 아버지 라반의 드라빔을 훔쳤다(19-20절). 드라빔은 가정 수호신으로 여기는 우상으로서 당시에는 상속권을 가진 증표 역할을 했다. 라반이 3일 만에 그 사실을 알고 7일을 쉬지 않고 뒤쫓아 왔다(22-23절). 결국 야곱을 만나 드라빔을 찾으려고 철저히 수색했지만 라헬이 자신이 탄 낙타 안장에 그것을 숨겨서 찾지 못했다. 라헬의 도둑질 행위를 몰랐던 야곱은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에게 심하게 항변했다(36-42절). 그리고 끝으로 42절 하반부에서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셨다.”고 했다.  “하나님이 보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아신다.”는 말이다. 사람은 내 생각과 진실을 잘 몰라도 하나님은 다 아신다. 사람은 잘못 판단해도 하나님은 잘못 판단하지 않는다. 어떤 환경과 처지에서도 넉넉한 믿음을 잃지 말라.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내 형편과 처지를 다 알아주시고 언젠가는 반드시 정의롭게 갚아주신다.  힘들면 기도하라. 기도할 때는 자기 기도제목만 나열하지 말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하라. 조금 기도하다가 응답이 없다고 낙심하는 이유는 대개 자기중심적으로 기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거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 낙심할 일이 없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 먼저 마음이 깊은 평강이 임하고 그처럼 마음의 천국을 이룰 때 하나님은 가장 선한 열매를 허락하신다. 2. 하나님은 나를 지켜주신다  하나님은 라반에게 야곱이 당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계시지 않았다. 심지어는 라반의 꿈에 나타나 야곱을 지켜주셨다(24절). 그렇게 하나님은 이제까지 우리를 지켜주셨고 앞으로도 지켜주실 것이라고 약속

When One Hurts, All Hurt 한 사람이 아파할 때 모두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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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a coworker called in sick due to extreme pain, everyone at the office was concerned. After a trip to the hospital and a day of bed rest, he returned to work and showed us the source of that pain―a kidney stone. He’d asked his doctor to give him the stone as a souvenir. Looking at that stone, I winced in sympathy, remembering the gallstone I had passed years ago. The pain had been excruciating. 한 직장 동료가 극심한 통증으로 병가를 내겠다고 연락이 왔을 때 사무실의 모든 사람들이 걱정했습니다. 병원에 다녀오고 하루를 집에서 쉰 뒤, 그는 직장에 다시 돌아와 그 통증의 원인이었던 신장결석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의사에게 그 돌을 기념물로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나는 그 돌을 보면서 내가 오래 전에 제거했던 담석이 떠올라 덩달아 몸이 움찔했습니다. 그 통증은 실로 엄청났었습니다. Isn’t it interesting that something so small can cause a whole body so much agony? But in a way, that’s what the apostle Paul alludes to in 1 Corinthians 12:26: “If one part suffers, every part suffers with it.” Throughout chapter 12, Paul used the metaphor of a body to describe Christians around the world. When Paul said, “God has put the body together”(v. 24),

서로 힘써 위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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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은 볼 수 없어도 삶 속에서 그 손길을 느낄 수 있다. 기도할 때 성령님은 내 귀에 들리게 말씀하지 않아도 진실한 믿음을 가진 마음의 귀로 성령님의 위로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그 위로를 받고 성령충만해지면 한 가지 뚜렷한 현상이 생긴다. 자신도 누군가의 위로자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다 약하다. 강자에게도 약한 부분이 있다. 자기의 못남은 자신이 잘 안다. 누구에게나 위로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위로의 샘터로 교회를 세우셨다. 위로는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받는 사람에게 큰 힘과 용기를 준다. 말 한마디가 영혼을 살리고 작은 위로 하나가 인생을 바꿀 수 있다. 위기는 위로를 통해 극복된다. 행복을 원하면 먼저 위로하라. 세상의 동기가 아닌 하늘의 동기를 따라 움직이라. ‘믿음의 말’을 들려주는 것에서 끝나지 말고 ‘위로의 말’을 들려주는 것까지 잘하라. 더 나아가 ‘위로의 말’을 ‘위로의 손’으로도 나타내라. 아픈 자를 보고 외면하지 못해 힘써 돕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될 때 그는 누군가에게 그 순간의 천사가 된 셈이다.  예전에 필자가 이런 메일을 받았다. “목사님! 저는 초등학교 4학년이에요. 목사님 말씀이 참 은혜가 돼요. 이제 저에겐 꿈이 생겼어요. 저도 앞으로 목사님이 될래요. 노력할게요. 더 좋은 말씀 주세요.” 그 짤막한 메일은 그날 필자에게 있었던 마음의 울적함을 사라지게 했다. 그때 그 어린 소년은 필자에게 위로의 천사였던 셈이다. 이 세상에 격려가 필요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격려는 삶에 용기와 희망을 주고 최상의 능력을 발휘하게 한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힘써 격려하는 사람이다. 주님은 마지막 유언 설교에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말씀했다. 보혜사란 ‘옆에서 위로하는 분’이란 뜻이다. 성령님은 옆에서 계속 나를 위로하신다. 서로 힘써 위로하면 위로받는 사람과 위로하는 사람에게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치게 된다. 심장이 잘 움직이면 그로 인해 손가락과 발가락까지 건강해지듯이 성령 안에서 어머니의 심정을

Faith, Love and Hope 믿음, 사랑,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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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ther it is caring for a relative, helping a neighbor or volunteering your time, be encouraged as you do the work God has called you to do. Your labor can be a powerful testimony of faith, hope, and love. [Lisa Samra] 친척을 돌보든지, 이웃을 돕든지, 아니면 시간을 내어 봉사하든지, 하나님이 당신에게 하라고 부르신 일을 할 때에는 용기를 내십시오. 당신의 수고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강력한 간증이 될 수 있습니다. [ Our Daily Bread 20180412 "Faith, Love and Hope" ] [ 오늘의 양식 20180412 "믿음, 사랑, 소망" ]

How Long? 어느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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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Lewis Carroll’s classic  Alice in Wonderland ,  Alice asks, “How long is forever?” The White Rabbit responds, “Sometimes, just one second.” 루이스 캐롤이 쓴 고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는 “영원이라는 게 얼마나 오래지?”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하얀 토끼는 “가끔은 단지 1초”라고 대답합니다. That’s how time felt when my brother David suddenly died. The days leading to his memorial dragged on, intensifying the sense of loss and grief we felt. Every second seemed to last forever. 내 형 데이빗이 갑자기 죽었을 때 시간이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형의 장례식 날까지 우리의 상실과 슬픔은 점점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매 1초가 마치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Another David echoed this sentiment, singing, “How long, Lord? Will you forget me forever? How long will you hide your face from me? How long must I wrestle with my thoughts and day after day have sorrow in my heart? How long will my enemy triumph over me?”(Psalm 13:1–2). Four times in just two verses he asks God, “How long?” Sometimes the pains of life seem as though they will never end. 또 다른 데이빗(다윗왕)의 노래는 이런 느낌을 정확히 반영했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