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을 잘 관리하는 길

 

[ 애셔 브라운 듀런드 : a study from nature 1845 ]


본문말씀 : 고린도후서 10장 7-11절


7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9 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 같이 생각하지 않게 함이라 10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11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일이 같은 것임을 알지라



< 잘못된 기복신앙을 버리라 >

 인천의 한 개척교회에서 젊은 담임목사가 열심히 전도해 1년 만에 약 40명이 등록하면서 잘 성장했다. 어느 날 교회에 등록해 몇 달을 잘 다니던 부부가 나오지 않으면서 자녀와 어머니와 시동생까지 나오지 않았다. 교회가 너무 좋다고 등록해서 아내 집사는 주일 저녁 예배 때 피아노 반주 봉사까지 했는데 갑자기 교회를 안 나와서 목사가 그 연유를 물었다. 알고 보니까 거짓 예언에 미혹된 것이었다.

 그 얼마 전에 한 여자가 자신이 예언해 준다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집사님! 당신이 우리 교회로 오지 않으면 당신 아들이 5년 안에 큰 변을 당합니다.” 그 말을 듣고 그녀는 겁이 덜컥 났다. 자신이 불편한 몸으로 어렵게 얻은 외아들이 5년 안에 큰 변을 당한다니까 그다음에는 아들을 살리겠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혔다. 목사가 그런 거짓 예언에 속지 말라고 극구 말려도 그녀는 “죄송해요. 저는 아들을 살려야 해요.”라는 말을 남기고 결국 그 교회로 떠났다. 불행한 일이다.

 가끔 보면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실제로는 잘못된 기복신앙과 무속신앙에 젖은 사람이 있다. 믿음을 내세우고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한 거짓 교주가 “능력이 많다. 치유를 주겠다. 예언해 주겠다. 종말의 때를 정확히 안다.”라고 선전하는 말에 미혹되어 바른 믿음을 버리고 외적인 신비 체험을 추구하면 영혼이 크게 침탈당한다. 외적인 은사 신앙과 체험 신앙에 집착하지 말고 내면을 보고 내면을 잘 관리하는 믿음을 추구하라.

< 내면을 잘 관리하는 길 >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권면이 주는 교훈으로서 인생의 참된 승리를 위해 내면을 잘 관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외모만 보지 말라

 당시 일부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언변이 좋은 것, 신비 체험을 한 것, 신기한 은사를 행하는 것과 같은 외모만 보고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되었다(7절). 그처럼 외모나 외적인 것만 보지 말고 더 나아가 외모로 남을 평가하지 말라. 물론 외모를 보지 말라는 말이 외모를 가꾸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남을 외모로 평가하지는 않아도 나 자신은 힘써 외모를 가꿔서 나만의 매력을 나타내라. 키가 크면 훤칠한 멋이 있지만 키가 작으면 귀여운 멋이 있다. 미소 띤 얼굴, 평안한 얼굴, 밝은 얼굴을 하고 나의 내면을 잘 관리하면 묘한 매력이 나타난다.

 어떤 부모는 자녀에게 외모보다 내면을 보라고 수시로 교육했다. 그래서 자녀가 좀 더 내면을 보는 틀이 생기면서 행복의 기초를 단단히 쌓았다. 그 교육은 나중에 자녀뿐만 아니라 부모에게도 수지맞는 교육이 되었다. 부모가 점차 늙으면서 외모가 부족해져도 자녀가 좋은 내면 교육으로 자신을 잘 이끌어 준 부모를 외모와 상관없이 여전히 좋아하고 사랑하고 존중해 주었기 때문이다.

 겉사람은 점차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후 4:16).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으면 땀보다 땅을 추구하는 매력 없는 겉사람이 땅보다 땀을 추구하는 매력적인 속사람으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외적인 현실에 사로잡히지도 말고 외적인 성공에 집착하지도 말라. 겉사람도 잘 가꾸면서 속사람은 더욱 잘 가꾸라. 외모나 외형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수시로 기도하면서 나를 위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 내적인 건강을 잃지 않고 아픔과 상처와 욕망을 넉넉히 극복하며 살 수 있다.

2. 남을 세워 주라

 바울의 대적들은 은사와 신비 체험을 자랑하면서 남의 영혼을 파괴했지만 바울은 은사와 신비 체험을 자랑하지 않으면서 묵묵히 남의 영혼을 세워 주었다(8절).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보내기 전에 엄한 책망의 편지들을 보낸 것도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놀라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였다(9절). 당시 바울의 대적들은 외적인 추천서, 은사 체험, 신비 체험 등으로 자신들의 영성을 내세우면서 바울이 영성이 없다고 폄하했지만 바울은 ‘영성을 자랑하는 것’보다 ‘영혼을 세워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상대를 사랑하고 세워 주면 나에 대한 집착이 줄어들고 나를 객관화시키는 능력이 커지면서 내면이 강건해진다. 특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높이면 나를 객관화시키는 능력이 더 탁월해지면서 객관적인 폭넓은 시야가 생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생각과 시야가 좁아지고 자기중심주의에 빠지는 것은 잘못 믿고 있다는 표식이다. 왜 남을 위한 중보기도가 소중한가? 자기중심주의를 버리고 남을 세워 주는 소중한 기도이기 때문이다.

 어떤 목사가 성도 앞에서는 “성도님을 위해 기도할게요.”라는 말을 잘 안 하지만 성도가 예배 후 교회를 떠날 때나 어디론가 향하는 것을 볼 때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면서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 그분을 지켜 주소서.” 힘들게 사는 성도나 짝이 없이 혼자 나오는 성도를 위해서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면서 더욱 간절히 기도한다. 그런 소리 없는 중보기도가 성도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어떤 아버지가 자녀 앞에서는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어.”라는 말을 잘 안 하지만 자녀가 외출할 때나 차에서 내려 어디론가 향할 때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면서 눈물로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 사랑하는 자녀를 지켜 주소서.” 그 소리 없는 중보기도가 자녀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말과 행동과 눈빛과 헌신과 봉사와 후원으로 세워 주면서 특히 기도로 세워 주라. 그러면 그 기도가 결코 헛되지 않고 더 나아가 자기중심주의도 극복되는 놀라운 역사가 내면에 이뤄질 것이다.

3. 언행을 일치시키라

 바울의 대적들은 바울이 편지를 쓸 때는 무게가 있고 힘도 있지만 몸으로 대할 때는 몸도 약하고 말도 못한다고 비방했다(10절). 실제로 바울은 몸이 약해서 백내장과 뇌전증(간질)으로 추정되는 만성 질병이 있었다. 주후 2세기에 쓰인 <바울 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작은 키, 왜소한 체형, 굽은 다리, 찌푸린 눈썹, 그리고 매부리코를 가졌다. 게다가 말솜씨도 좋지 않아 대적들은 “왜 저렇게 설교해?”라고 바울을 비방했다.

 그에 대해 바울은 어떻게 자기변호를 했는가? 본문 11절을 보라.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일이 같은 것임을 알지라.” 바울은 말재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떠나 있을 때 편지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 행하는 것이 같다는 사실을 알라고 했다. 즉 바울은 언행이 일치된 삶을 살았다. 그것이 그의 내면을 강하게 만든 핵심 요소였다.

 언행을 일치시키고 말씀대로 살라. 다만 말씀대로 살겠다고 하다가 율법주의에 빠져 율법으로 사람과 사랑을 질식시키지는 말라. 법보다 사랑이 우선적인 가치다. 2차선 도로에서 밤에 운전할 때 앞에서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그를 피할 방법이 중앙선을 넘는 방법밖에 없다면 중앙선을 넘어서라도 사람을 살리고 봐야 한다. 그때 ‘중앙선 침범 금지’라는 교통 법규를 지키려고 사람을 친다면 그것은 잘못된 율법주의다.

 법을 최대한 힘써 지킨다는 전제 하에서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때로는 법의 선을 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말할 때도 늘 진실을 말하고 정직하기를 위해 최대한 힘쓴다는 전제 하에서 극히 제한된 상황에서는 백색 거짓말도 용납될 수 있다. “백색 거짓말이라도 절대 하면 안 돼.”라고 완벽함을 내세우는 것은 자신에게 얼마나 거짓되고 모순된 삶이 많은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잘못된 율법주의다.

< 사랑의 법이 우선이다 >

 어느 날 도로에서 운전할 때 차가 너무 막혔다. 그때 어느 정도 막히면 인내하고 기다렸다가 가면 된다. 그러나 차가 너무 막혀서 계속 밀리는 차로 인해 도로가 주차장이 되면 교통경찰이 와서 중앙선을 침범하더라도 일부 차를 유턴 시켜서 차를 분산시킨다. 그때 “왜 교통경찰이 교통 법규를 어기게 하느냐?”라고 하면 그것도 잘못된 율법주의다.

 교통경찰이 없는 경우에 교통지옥 상황이 심화되면 때로는 자신의 양심을 교통경찰 삼아 최대한 주의한 채 남과 전체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차 분산에 일조하려고 중앙선을 넘어 유턴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런 행동은 교통 법규를 최대한 잘 지킨다는 전제 하에 극히 예외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무조건 법을 완벽하게 지켜야 한다면서 지옥 상황을 방치하거나 그 상황이 심해지고 있어도 가만히 있는 것은 잘못된 율법주의다.

 법과 종교 자유를 지킨다면서 남이 죽음의 길로 들어서거나 남을 죽음의 길로 내모는 것을 그냥 지켜보기만 하지 말라. 그래서 때로는 사이비 교주를 제3자가 대신 고발도 해 주어야 한다. 율법보다 사랑의 법이 우선이다. 물론 사랑을 명목으로 혹은 사랑을 핑계 삼아 법 위반을 쉽게 하면 안 된다. 신실함을 기반으로 차원 높은 사랑의 법을 제한적인 경우에만 실행하라. 그처럼 법을 힘써 지키고 자신이 한 말이나 약속도 힘써 지키라. 하나님과의 약속은 더욱 힘써 지키라. 언행일치에 힘쓸수록 내면은 강건해진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세상에서는 외형과 숫자로 성장을 보여주더라도 교회에서는 외형과 숫자에서 복을 찾지 말라. 외형과 숫자를 극복하면서부터 성도에게는 복된 교회생활과 믿음생활이 펼쳐진다. 앞으로 살면서 내면을 보는 안목을 더욱 기르고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기쁨과 평안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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